2024년 5월 11일(토)

‘명품 NGO’ 만드는 게 꿈… 투명성·사명감이 핵심

기아대책 유원식 회장 인터뷰

“출근 첫날, 첫마디가 ‘웃으면 안 됩니까?’였습니다. 직원들 얼굴이 하나같이 무섭더라고요. 그런데 지금은 다들 ‘허허실실’로 표정이 바뀌었습니다.”

유원식(57·사진) 기아대책 6대 회장이 취임한 지 두 달, 조직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회장실은 작은 방으로 옮겨졌고, 식물 한 포기 없던 사무실 구석구석에 나무가 놓였다. 복도와 계단 곳곳에는 간사 자녀들이 그린 그림 액자가 여럿 걸렸다.

1981년 삼성전자 입사 후 HP PSG그룹장,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 대표이사, 한국오라클 대표이사를 역임하며 ’12년 CEO’ 경력을 자랑해온 그가 돌연 자신의 이력에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 회장’을 추가한 이유는 무엇일까. 설립 25년 사상 최초로 선임된 기업 전문 경영인 출신 회장이 그리는 기아대책의 미래를 들었다.

①이상범 모잠비크 기아봉사단원과 기아대책 어린이교육센터 학생들. ②기아대책의 시그니처 행사 '한톨나눔축제'에 참여한 청소년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조선일보 DB 제공
①이상범 모잠비크 기아봉사단원과 기아대책 어린이교육센터 학생들. ②기아대책의 시그니처 행사 ‘한톨나눔축제’에 참여한 청소년들. /한국국제기아대책기구·조선일보 DB 제공

―취임 후 지난 두 달간 어떻게 지냈나. 전문 경영인에서 비영리단체 회장으로 변신한 소회가 궁금하다.

“‘감사’와 ‘행복’ 두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사람은 잘하는 일과 좋아하는 일 사이에서 항상 고민한다. 인생의 전반전은 잘하는 일(기업 경영)을 하며 보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페스탈로치(1746~1827·스위스 교육학자)를 존경하고, 커서 보육원 원장이 되겠다고 다짐했던 소년이었다. 인생의 후반전을 맞아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됐으니 무척 감사하다. 기아대책 가족들과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 또한 큰 행복이다. 직원 중에는 이전 직장의 연봉 절반만 받고 온 사람도 있다. 그만큼 일에 대한 사명감과 동기가 강하다. 이사진이 ‘직원들은 간사가 아닌 천사’란 말을 할 정도다.”

―기아대책은 지난 1년간 회장 선임에 무던한 노력을 기울여왔다. 24년 동안 회장을 맡아온 고(故) 정정섭 회장 사후 내부에 여러 위기가 있었고 이를 극복할 리더십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인터뷰 제안을 받아들였나. 큰 결심이 필요했을 듯하다.

“처음부터 이 일을 하리라 마음먹고 34년 몸담았던 IT 업계를 떠난 것은 아니다. 지난해 12월 인터뷰 제의를 받을 당시 기아대책에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전례 없이 외부 경영인을 초빙해서 객관적으로 잘잘못을 조정하고 성장하겠다는 생각이 대단해 보였다. 성숙한 조직으로 나가는 틀을 만드는 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리라 봤다.’역경’을 거꾸로 하면 ‘경력’이다. 누구나 크려면 성장통이 필요한데, 지난 1년이 기아대책에 그런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기아대책은 기독교적인 미션이 다른 기관보다 많은 곳으로, 나 역시 크리스천으로서 정체성도 영향을 미쳤다.”

―2012년부터 3년 연속 한국오라클은 ‘한국 최고의 일하기 좋은 기업 대상’을 받았는데, 기아대책 조직을 어떻게 변신시킬지 궁금하다.

“더나은미래가 인터뷰한 짐 콜린스의 저서 ‘굿 투 그레이트(Good to Great)’는 경영의 바이블과도 같은 책이다. 우리 간사들이 일하기 좋은 직장을 만들기 위해 생각한 건 세 가지다. 첫째는 비전에 맞는 결과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비영리조직을 영리조직처럼 평가하려 하니까 자꾸 후원금을 성과 기준으로 끌고 오는데, 그건 잘못됐다. 기아대책의 성과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살렸느냐’다. 둘째는 구성원을 존중하는 문화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피라미드를 보면, 4단계가 ‘자기 존중의 욕구’다. 5단계 자아실현 욕구는 개인이 달성해야 할 영역이지만, 존중의 욕구는 조직에서 소화할 수 있다. 셋째는 직원을 키우는 것이다. 조직이 발전하려면 직원이 성장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수다. 특히 리더십 교육이나 행복한 삶에 대한 강연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그는 부임하자마자 본부장급에게 숙제도 내줬다고 한다. 내년도 부서별 업무 계획과, 직원 역량 강화를 위한 발전 계획, 10년 후 개인의 성장 목표를 세우는 경력 계획이 그것이다.)

―기아대책은 기아봉사단(선교사)을 해외 사업 지부장으로 임명한다는 특징이 있다. 현지의 언어와 문화를 잘 안다는 장점이 있으면서도, 전문성 결여에 대한 우려가 있는 게 사실이다. 기아대책의 국내외 사업 정책이나 전략에 대한 방향은 변함없이 유지되는가.

“기아대책의 국제 구호는 ‘공동체 비전(Vison of Community·VOC)’를 목표로 한다. 공동체의 핵심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을 리더로 성장시키고, 그 리더가 공동체를 키우는 것이 기본 틀이기 때문에 해외 사업의 40%는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그런데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돈만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다. 기아봉사단은 평생을 해당 지역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은 분들이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 현지 문화와 언어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 이들이 아이들을 직접 보살피고 어루만져주는 것은 기아대책만의 큰 강점이다.

또 다른 강점은 현지 기아봉사단원 발굴이다. 이번 네팔 지진 구호 당시, 기아대책은 네팔인 기아봉사단원 크리스의 활약으로 가장 피해가 컸던 신두팔촉(Sindhupalchowk)에서 집중 구호 활동을 펼칠 수 있었다. 앞으로도 현지인 기아봉사단원을 키워 공동체의 자립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국내 사업, 대북 지원, 해외 원조 등 각각의 영역에 별도 법인을 두고 있다. 워낙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다 보니 선택과 집중의 전략이 필요할 듯한데.

“좋은 지적이다. 법인이 많아진 것은 성장 과정에서 생긴 일이다. 부임하기 전까지 기아대책은 사단법인 기아대책, 사회복지법인 기아대책, 재단법인 국제개발원, 재단법인 행복한나눔, 재단법인 섬김 등 5개 자매 법인으로 이뤄져 있었는데 지난 2월 총회에서 이를 3개로 줄이자는 결정이 내려졌다.

기업에서는 ‘Keep the Best, Change the Rest(최고는 유지하고, 나머지는 바꿔라)’라는 말을 많이 한다. 국내 사업 부문에서도 장애인 시설이나 이주 노동 시설처럼 다른 NGO가 잘할 수 있는 영역보다는 우리가 잘하는 영역에 자원을 집중하려 한다. 그 일환으로 기아대책의 정체성을 가장 잘 대변하는 국제사업본부의 인원을 기존의 2배로 늘렸다.”

―2년 전 더나은미래가 양호승 한국월드비전 회장·이일하 굿네이버스 회장과 진행한 대담에서 ‘곧 모금의 정체기가 올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리고 실제로 신규 후원자보다 기존 후원자 관리에 더욱 힘을 써야 하는 시대가 왔다. 미·영국 대형 NGO의 평균 후원 지속 기간은 7~8년에 달하는 반면 우리나라는 2~3년에 그친다. 기아대책은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나.

“기업도 마찬가지다. 30년 전 컴퓨터 안 쓰던 시대엔 파는 게 중요했지만, 이젠 좋은 성능과 서비스로 기존 고객을 지키는 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고객 관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피드백(feedback)’이다. 내가 경영인으로서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피드백을 잘했기 때문이다. 나는 만났던 모든 이에게 늘 하루 안에 ‘시간을 내 주셔서 감사하다’고 메일을 보냈다. 기아대책도 이런 후원자 피드백을 강화하려 한다. 온라인·모바일 콘텐츠를 늘리고, 연중 4회 후원자 소모임을 실시하는 등 후원자 서비스팀이 만든 ‘감동 UP’ 프로젝트가 그 예다. 파트너 기업과의 관계도 중요하다. 기아대책 전체 모금액 중 기업 모금액은 약 25%에 달한다. 하지만 도박을 해서 돈을 번 기업, 사람의 건강을 해쳐서 돈을 버는 유해 기업의 후원은 안 받는다. 이런 정체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시그니처 행사인 ‘한톨나눔축제’에도 다수의 기업이 후원사로 참여하는 관계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고액 기부자 이슈도 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소사이어티(1억원 이상 고액 기부 클럽)’가 성공하면서 많은 NGO가 벤치마킹에 나섰다. 앞으로 고액 기부, 유산 기부가 더욱 활발해질 전망인데, 이에 대한 전략은 무엇인가.

“기아대책은 교회 중심 모금이 강하기 때문에 고액 후원에는 조금 약하다. 기업과 개인, 기존과 신규 후원자 구성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숙제가 될 것이다. 지난해 10월 발족한 ‘필란트로피 클럽’에는 현재 10분이 가입돼 있다. 금년 말까지 20명의 회원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다. 유산 기부 후원자들을 위한 헤리티지 클럽도 준비 중이다. 김앤장 법률사무소의 자문을 거쳐 기본 틀을 완성했고 다음 달 중 첫 회원이 나올 예정이다.”

―재임 동안 이루고 싶은 목표는 무엇인가. 3년의 임기를 마친 뒤 듣고 싶은 평가가 있다면.

“‘저 사람이 있었던 기간 동안 기아대책이 명품 NGO가 됐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다. 기아대책은 후원자들의 기부금을 수혜자와 연결해주는 ‘파이프라인’이다. 파이프라인의 전제 조건은 ‘투명’ ‘정도’ ‘윤리’다. 기아대책이 가장 투명하고, 가장 사명감 있는 NGO라는 브랜드를 얻길 원한다.”

유원식 회장은 이어 두 가지 소망을 더 이야기했다. 자신의 다음 대에는 조직 내부에서 회장이 선출되었으면 한다는 것, 그리고 NGO 직원들의 ‘헌신페이’ 문화가 바뀌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3개 회사 CEO를 했는데, 내 후임 사장은 모두 조직 내부에서 나왔다”며 “기아대책도 외부 회장은 나 하나로 끝이면 좋겠다”고 했다. 이어 “NGO 직원들에 대해 사회가 보는 시각은 ‘열정페이’를 넘어 ‘헌신페이’인 것 같다”며 “좋아서 선택한 일이나 가난하게 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는 문화는 좀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인터뷰=박란희 편집장

정리=권보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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