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일(수)

기업 메세나의 대표 모델, LG아트센터 15년

“해외 숨은 명작 발굴, 초대권 없는 공연‐ 수익 생각했다면 불가능”

“2012년 ‘입센(Ibsen·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격년으로 열리는 국제연극제)’ 페스티벌에 참석했는데, 세계적인 예술가들이 ‘꼭 한 번 서보고 싶은 무대’로 LG아트센터를 꼽더라. 놀라면서도 기분이 좋았다.”(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연극평론가)

“클래식과 오케스트라, 발레만 되풀이되던 시절, LG아트센터에서 소개하는 독특하고 신선한 무대는 마치 ‘오아시스’ 같은 느낌이었다.”(최우정 팀프(TIMF)앙상블 예술감독·작곡가)

최근 문화·예술이 가진 사회적 가치와 역할이 커지면서 기업이 이 분야를 지원하는 일명 ‘메세나(mecenat)’ 활동도 각광받고 있다. 공연장을 짓는 것도 그중 하나. 이선철 숙명여대 정책산업대학원(문화예술전공) 교수는 “직접 극장을 짓는 건 메세나의 꽃”이라며 “의사결정 과정이 어렵고 상당한 돈과 시간이 투자되지만, 파급 효과는 그만큼 크다”고 했다.

미국에 ‘에이티앤티아트센터(AT&T Performing Arts Center)’, 일본에 ‘산토리홀(Suntory Hall)’이 있다면, 우리나라엔 ‘LG아트센터’가 기업 메세나를 대표하는 공연장이다. LG그룹 사회공헌 활동의 일환으로 지난 2000년 설립돼, 올해로 15주년을 맞았다. 이곳은 콘텐츠, 공연장 경영·관리, 창작예술가 지원 등에서 한발 앞선 시도를 펼치며 한국 공연시장의 다양성이나 시장규모를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2010년 공연돼 전 석 매진을 기록했던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Matthew Bourne’s Swan Lake)의 한 장면. /LG아트센터 제공
지난 2010년 공연돼 전 석 매진을 기록했던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Matthew Bourne’s Swan Lake)의 한 장면. /LG아트센터 제공

◇잿빛도시 ‘강남’에 탄생한 공연장, 국내 문화 지형도를 바꾸다

“흥행에 연연하지 말고 세계 최고 수준의 문화예술을 우리나라 관객들에게 소개해 달라.”

1994년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당부가 세계적인 공연장 건설에 도화선이 됐다. 당시 국내 공연문화는 심각한 편중 현상을 겪고 있었다. 무대는 초대형 오케스트라·클래식이 아니면 소극장 연극일 정도로 양분돼 있었고, 대부분의 시설이 대학로·세종문화회관·호암아트홀·정동극장 등 강북에 밀집돼 있어 강남권은 상대적 ‘불모지’로 분류됐다. LG아트센터 설립 준비 작업에 참여했던 한 관계자는 “LG가 선정한 공연장 자리(서울 역삼동)에 ‘반도유스호스텔’이 있었는데, 땅의 모양이나 위치가 공연장을 하기에는 ‘너무 안 좋다’는 평가가 많았다”고 회상했다.

시대적인 배경도 여의치 않았다. 1998년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문화에 대한 소비 심리가 잔뜩 위축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김미혜 교수는 “국가가 안고 있는 짐이 너무 커서 예술에 대한 관심을 바라기 미안했던 시기였다”고 했다. 많은 기업은 오히려 신규 사업을 줄이고 문화 지원을 축소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LG그룹이 고민했던 건 전문성과 독창성이다. 이제까지 한국 공연계에 없었던 것, 관객들에게 필요한 것을 찾았고, 그 결과 다양한 ‘동시대(contemporary) 예술공연’이란 콘셉트가 정해졌다. 2000석 이상의 대공연장과 300석 이하의 소극장만 있었던 국내 환경에서 1000석 규모 객석을 고집했던 것도 관객들의 다양한 요구를 새로운 방식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였다. ‘예술의전당’에서 10년간 공연사업 업무를 담당했던 김의준 초대 대표이사를 전격 영입하며 전문성을 더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지난 15년 동안 연극·무용·클래식·재즈·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세계적 공연을 4400여 회에 걸쳐 국내에 소개하며, 320만명의 누적 관람객 수를 기록한 저력의 토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숨은 명작 소개와 창작 지원, 국내 예술계 살찌웠다

“2002년에 공연했던 ‘단테의 신곡'(탈리아극장·독일)은 해외 투어가 기술적으로 어려웠던 작품이에요. 35℃의 물 3만리터로 무대를 가득 채우는 대공사를 해야 하거든요. 같은 해 공연했던 ‘검은 수사'(카마긴카스·러시아)는 더하죠. 공중에 띄운 무대를 2층의 200석에서만 볼 수 있을 정도로 파격적이에요. 결국 극장 대표님을 모시고 폴란드까지 가서 작품을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무대에 올릴 수 있었죠.”(이현정 LG아트센터 기획팀장)

LG아트센터의 가장 큰 특징은 차별화된 공연 콘텐츠다. 국내에서 접하진 못했지만, 관객들이 볼 가치가 있는 작품이 그들의 타깃이 된다. 피나 바우슈(Pina Bausch·독일 무용가), 피터 브룩(Peter Brook·영국 연출가) 등 세계 최고 거장들의 작품이나, 로메오 카스텔루치(Romeo Castellucci·이탈리아 연출가), 빔 반데키부스(Wim Vandekeybus·벨기에 안무가) 등 최근 해외 공연계에서 가장 ‘핫’한 예술가들도 모두 섭외 대상이다. 남아프리카·리투아니아·세르비아·에스토니아 등 낯선 지역의 작품들도 자주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세계 구석구석 발품을 팔기도 하고, 잡지나 화보에서 찾은 작은 단서만으로 지루한 섭외전을 치르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장광열 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 대표(무용평론가)는 “독일의 ‘피나 바우슈 무용단’은 세계에서 초청하기 가장 어려운 곳 중 하나인데, LG아트센터에는 6번이나 오더라”면서 “일반 관객들이 좋은 공연을 접한다는 것은 이로 인해 마니아들이 생기고, 저변이 넓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라고 했다. 다양성을 우선시하다 보니, 수익은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 이현정 팀장은 “‘검은 수사’ 같은 작품은 재정적인 걸 고려하면 절대 들여올 수 없다”고 했다.

초기 숨겨진 해외 명작 발굴에 집중했다면, 최근엔 국내 아티스트들의 작품 제작 활동을 지원하고, 그 결과물을 해외로 수출하는 비중도 늘고 있다. 2009년 제작한 양정웅의 ‘페르귄트'(2012호주오즈아시아페스티벌, 2013일본베세토연극제 공식 초청), 2011년에 제작한 이자람의 ‘억척가'(프랑스·루마니아·호주·브라질·우루과이 등 전 세계 10개국 순회공연 진행) 등이 대표적이다.

2011년과 지난해, 두 차례 LG아트센터의 지원을 받아 ‘더 코러스:오이디푸스’ 작품을 제작했다는 최우정 팀프(TIMF)앙상블 예술감독은 “창작자의 입장을 존중하면서도 전문적인 지원과 협조가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이현정 팀장은 “1998년 해외 페스티벌에 나갔을 때, 우리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었던 건 ‘김덕수 사물놀이패’ 등의 전통공연뿐이었는데, 최근에는 해외 유명 페스티벌이나 프로모터들이 한국 작품을 공식적으로 초청하는 경우가 꾸준히 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00년 서울 역삼동에 건립된 LG아트센터는 연면적 약 2만3000㎡에 1100여 개의 객석을 갖춘 공연장으로, 건립 이듬해 미국무대기술협회(USITT)‘ USITT 건축상’ 을 받았다. 2007년부터는 8년 연속 한국표준협회 공연장부문 서비스품질지수(KS-SQI) 1위로 선정된 바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지난 2000년 서울 역삼동에 건립된 LG아트센터는 연면적 약 2만3000㎡에 1100여 개의 객석을 갖춘 공연장으로, 건립 이듬해 미국무대기술협회(USITT)‘ USITT 건축상’ 을 받았다. 2007년부터는 8년 연속 한국표준협회 공연장부문 서비스품질지수(KS-SQI) 1위로 선정된 바 있다. /LG아트센터 제공

◇병폐에 맞선 소신, 한국 공연예술계의 패러다임을 바꾸다

“회장님도 돈 내고 보러 온다더라고요. 초대권이 아예 없다고요. 처음에는 욕하는 사람도 많았고, 건방지게 보는 시선도 있었죠. 관행 같은 거였으니까요.” 김미혜 한양대 연극영화과 명예교수의 회상이다. ‘초대권 없는 공연장’ 역시 LG아트센터의 혁신적 시도 중 하나였다. 초대권 문화는 국내 문화예술계의 고질적인 병폐. 장광열 국제공연예술프로젝트 대표는 “공공기관이 공연장을 주로 운영하다 보니 초대권이 관례화된 면이 있었는데, 제작사들 입장에서 이는 엄청난 부담으로 작용한다”면서 “올바른 예약 문화의 정착을 저해하는 면도 컸다”고 설명했다.

LG아트센터는 설립 초기부터 초대권 없는 공연장을 선포했다. 주변에선 회의적인 반응 일색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이를 지켜나갔다. LG아트센터 관계자는 “으레 초대를 받았던 분들에게 초대권이 없다고 딱 잘라 거절하는 것도 어렵지만, 티켓이 팔리지 않았을 때 자리를 그대로 비우고 공연을 해야 하는 것도 곤혹스러운 일이었다”며 “그럴수록 마케팅이나 프로모션, 고객 서비스에 더 많이 신경을 쓰게 되더라”고 말했다. 실제로 초대권 근절은 예약 문화의 선진화로 이어졌다. LG아트센터는 개관연도부터 한 해 동안 이뤄지는 공연을 다양하게 묶어 부담 없는 가격에 제공하는 ‘시즌 패키지’ 제도를 시행했는데, 현재는 총 구매의 30% 정도가 패키지로 판매될 정도로 높은 충성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국내 문화계에 많은 자극과 변화를 주었다. 장광열 대표는 “LG아트센터의 등장 이후 초대권 폐지 문화가 점점 다른 공연장과 예술단체로까지 퍼져 나가는 추세”라고 했다. 실제로 지난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는 “국공립공연장에서 초대권을 폐지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 15년간 LG아트센터가 이처럼 소신 있는 운영을 해올 수 있었던 이유는 LG그룹의 든든한 지원 덕분이다. 실제로 LG는 LG아트센터의 운영 주체인 ‘LG연암문화재단’에 지금까지 총 1200억원가량을 투자해왔다. 이선철 교수는 “기업에 공연장은 수익 사업이 아니기 때문에, 시스템을 개선하고 좋은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투자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며 “LG아트센터를 ‘기업 메세나의 이상적인 모델’로 칭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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