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금)

김진우 교수가 말하는 벤처 기부 “벤처 기부, 비영리단체 역량 강화하는 계기될 것”

국내 첫 벤처기부 아산나눔재단 ‘파트너십온’… 선정 기관에 연간 최대 2억, 3년간 지원
특정 사업 위한 ‘꼬리표’ 예산 벗어나 계획에 따른 자유로운 재정 운용 가능

김진우 교수 /아산나눔재단 제공
김진우 교수 /아산나눔재단 제공

국내에도 ‘벤처 기부’가 시작됐다. 아산나눔재단이 최근 새롭게 시작한 지원 사업 ‘파트너십온(Partnership ON)’은 지원 형태가 기존과 크게 다르다. 사각지대 청소년 문제를 해결하는 비영리단체에 기관당 연간 최대 2억원을 최대 3년까지 지원한다. 이 돈을 인건비로 쓰든, 사업비로 쓰든 아무런 용도 제한이 없다. 문제 해결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식이다. 이뿐 아니라 지원받는 비영리조직 자체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전문가 그룹의 컨설팅을 포함한 비재정적 지원도 더해진다. 현장의 반응은 뜨겁다. 전국 5개 지역에서 열린 설명회에 500여명이 참여했고, 사업 설명회 이후엔 ‘이런 방식으로 지원하는 곳이 생겼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동’이라는 평이 나왔다.

지난달 30일, 아산나눔재단의 파트너십온 프로그램 설계에 참여한 김진우(50·사진) 덕성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를 만나 ‘한국형 벤처 기부 도입’ 뒷이야기를 들었다. 김진우 교수는 보건복지부 복지정책과·기초생활보장과장,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복지정책 서기관을 역임하고 영국 버밍엄 대학에서 사회정책학과 박사과정을 받은 사회복지 전달 체계 관련 전문가다. 삼성복지재단, 메트라이프코리아재단 등 다양한 민간 재단의 지원 사업 실행과 자문에 참여해 온 현장통이기도 하다.

―아산나눔재단의 파트너십온 지원 방식은 비영리를 타깃으로 국내에 도입된 첫 벤처 기부 사례다. 아직 생소한 개념인데, 기존의 지원 방식과 어떻게 다른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전폭적인 재정 지원이다. 선정된 기관엔 연간 최대 2억원을 3년간 지원할 계획이다. 어느 곳에 써야 한다는 제한도 없다. 벤처 투자자가 성공 가능성을 보고 과감하게 투자하듯, 비영리단체들이 큰 사회적 영향력을 만들어줄 것을 기대하며 과감한 시도와 혁신을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비영리조직 자체의 역량 강화에 대한 지원이다. 청소년 현장 전문가라고 할지라도, 조직을 운영하고 거기서 임팩트를 만들어내고 확장시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파트너십온 사업은 교수·비영리조직 전문가·사회복지 전문가·CEO 등으로 구성된 전문가 그룹인 ‘VP파트너스’가 비영리단체와 매달 회의를 가질 예정이다. 어떻게 사업을 이끌어나갈지, 3년 이후 어떤 출구 전략을 설정할지, 사회적 임팩트를 어떻게 평가할지 등을 함께 논의해 나갈 계획이다. 간섭하고 입맛대로 조정한다는 게 아니라, 평등한 관계에서 함께 고민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파트너로 선정된 기관에 대해 ‘수행 기관’이라는 말 대신 ‘혁신 리더’라고 칭한다. 2년 차 이후엔 해외의 좋은 사례나 모델 탐방 등의 기회도 제공된다.”

―정부,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재단 등 대부분이 프로그램 지원 방식으로 이뤄져 왔는데, 무척 파격적이다. 새로운 지원 방식을 도입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1991년 삼성복지재단에서 시작한 ‘작은사랑 큰나눔’ 사업이 최초의 ‘프로그램 지원 사업’이었다. 그전까지는 단순 현물 지원이 전부였다. 당시 현장에선 일대 충격이었다. 지원금·물품을 받아 전달하는 데 그쳤던 사회복지기관들이 처음으로 프로그램 기획과 실행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후 23년이 지났다. 프로그램 지원 방식은 보편화됐다. 문제는 지난 20여년간 이런 지원 방식이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회 내에서 기부나 지원에 의존하는 비영리 방식에 대한 회의가 커졌다. 사회적기업이나 사회적협동조합 같은 형태가 생겨났고 큰 흐름이 됐다. 문제는 소위 전통적인 비영리단체들이다. 이들을 가두는 건 기존의 틀에 박힌 지원 방식이다. 경직된 기존 방식 틀 안에선 혁신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도, 비영리를 넘어선 새로운 수익구조를 모색하는 것도, 그럴 동력도 없다. 이제 1000만원, 2000만원 지원하던 시대는 지났다. 지원 사업 생태계도 훨씬 더 풍성해져야 한다.”

―기존 지원 방식이 비영리단체의 역량 강화와 혁신을 막는다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면에서 그런가.

“비영리단체에 지원하는 자금 자체가 ‘꼬리표’ 달린 예산들이다. 특정 사업 이상의 다른 뭔가를 궁리하고 시도하기 어려운 구조다. 정부에서 사회복지시설로 지원하는 예산엔 사업비 항목이 아예 없다. 인건비·관리운영비 등이다. 그렇다 보니 외부 기업이나 재단에서 들어오는 지원금이 프로그램을 돌리는 유일한 동력이다. 그런데 이런 자금도 한계가 있다. 매번 새로워야 하고, 다른 재단에서 하지 않는 것이어야 하며, 지원 기간도 길어야 3년이다. 지원이 끝나면 또 다른 자금원을 찾아가야 한다. 노하우가 쌓이고 필요한 사업이라 여겨졌다고 해도, 기존에 깔려 있는 사업비가 없으니 스스로 이어나가기도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현장에서 엇비슷한 사업들이 기관을 달리해가며 반복되는 딜레마가 생긴다. 사업 노하우가 공유될 플랫폼도 없다. 삼성복지재단만 해도 매년 30개, 각각의 재단이 연간 수십 개에 달하는 사업을 한다. 분야, 지역, 사업 성격 등으로 나누어 결과보고서를 쉽게 공유하는 플랫폼만 만들어져도 좋을 텐데, 지금은 재단별로 들어가 일일이 어떤 사업이 있는지를 찾아봐야 한다. 그조차도 사업 유형보다 연대기 순으로 정리된 경우가 대부분이라, 현장의 노하우가 공유되지 않는다. 역량이 강화되기 힘든 구조다.”

―벤처 기부 방식을 처음으로 시도하다 보니, 매뉴얼과 지원 사업 틀을 만들고 현장에 설명하는 데도 어려움이 많을 것 같다.

“파트너십온 운영위원이 총 14명인데, 비영리 이해도가 있는 벤처 투자자부터 학계 교수진에 이르기까지 구성이 다양하다. 4개월 넘게 토론과 매뉴얼 작업을 하면서, 나부터도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데 시간이 걸렸다. 벤처 캐피탈에 관한 ‘스타트업 펀딩’ 같은 책들을 보며 새로운 세계에 눈을 많이 떴다. 현장에서도 이해하는 데 시간은 걸릴 것이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다. 23년 전 삼성복지재단이 처음 ‘프로그램 지원 방식’을 도입했을 때, 당시 그만한 역량이 되는 비영리단체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방식을 통해 지원 기관들은 어떤 방향을 지향해야 하는지, 현장 단체들은 어떤 역량을 키워야 하는지에 대한 메시지가 명확하게 전달되는 계기가 됐다. ‘벤처 기부’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현장과 지원 기관, 정부에도 ‘새로운 방향’에 대한 충격을 주리라 기대한다.”

―벤처 기부가 가능하기 위해선 상호 간의 신뢰가 핵심이다. 현장의 비영리단체들은 벤처 기부를 받을 준비가 됐다고 보는가.

“현재 1차 서류심사까지 마쳤다. 어떤 기관들이 지원할지 기대되면서 걱정도 됐다. ‘이런 방식을 받아낼 만한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1차 심사를 마친 지금은 자신감이 생겼다. 풀뿌리 단체 중에 정부 지원 대신 다양한 방법으로 재정을 확보해가면서 의미 있는 활동들을 이어온 곳이 있더라. 상상을 초월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들도 꽤 발견됐다.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맘도 들었다. 앞으로 2차 서류, 1박2일간의 프레젠테이션, 4차 현장 방문 등 긴 과정이 남아 있지만, 잘 발굴해서 사회적 영향력을 함께 만들어갈 것에 대한 기대감이 훨씬 커졌다. ‘벤처 기부’가 옳은 방향인지, 현장에선 어떻게 받아들일지 매뉴얼 작업을 하며 고민이 많았다. 이번 싱가포르에서 열린 ‘아시아벤처필란스로피네트워크(AVPN)’에 참석하면서 자신감을 많이 얻었다. 이미 세계적으로 큰 흐름이 형성돼 있고, 우리의 고민이 맥을 함께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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