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월)

가장 낮은 이들과 함께한… 빨간 냄비 100억의 기적

구세군 자선냄비, 모금에서 나눔까지
작년 모금액 97억… 해마다 증가해
위기가정 사업·청소년 복지 등에 후원 세월호 등 긴급구호 지원에도 쓰여
구세군 복지시설서 성장한 은행 지점장 취업 멘토·일대일 결연해 적극 후원

“모두가 외면할 때, 저를 받아준 곳은 한 곳뿐이었습니다.”

(왼쪽부터 시계방향) ①오늘도 자선냄비는 시민들의 따뜻한 나눔을 기다리고 있다. /구세군 제공, ② 구세군은 전국의 노인복지관, 치매노인주간보호센터, 양로원 등을 통해 노인 보호 및 돌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③ 1918년 설립된 아동복지시설 구세군 후생원은 아동 1명당 악기를 하나씩 배울 수 있도록 지 원해, 브라스밴드를 만들었다. /조선일보 DB
(왼쪽부터 시계방향) ①오늘도 자선냄비는 시민들의 따뜻한 나눔을 기다리고 있다. /구세군 제공, ② 구세군은 전국의 노인복지관, 치매노인주간보호센터, 양로원 등을 통해 노인 보호 및 돌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③ 1918년 설립된 아동복지시설 구세군 후생원은 아동 1명당 악기를 하나씩 배울 수 있도록 지 원해, 브라스밴드를 만들었다. /조선일보 DB

신선희(31)씨가 5년 전 겨울을 떠올리며 말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갑작스레 임신을 한 그녀에겐 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부모로부터 쫓겨난 후 미혼모 시설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만삭인 그녀를 받아주는 곳은 없었다. 다짜고짜 입양을 권유하거나, ‘너무 늦게 왔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신씨가 마지막 희망을 걸고 전화를 한 곳은 구세군 미혼모 시설인 ‘두리홈’. “예정일이 임박했는데 갈 곳이 없다고 하자, 두리홈에선 아무것도 묻지 않고 ‘빨리 여기로 오세요’라고 말했어요. 머뭇거리며 두리홈 입구를 서성거리는데, ‘찾아오기 힘들지 않았느냐’며 따뜻하게 맞아주셔서 눈물이 왈칵 났습니다.”

미상_그래픽_나눔_2014자선냄비나눔_2014

아들을 낳아 기르는 동안 신씨는 사회의 편견과 싸워야 했다. 중국에서 의학을 공부해 전문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데도, 면접을 볼 때마다 ‘미혼모 꼬리표’를 붙이며 불합격 통보를 했다. 어렵사리 병원에 취업했지만, 아픈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금방 그만둬야 했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어렵게 생계를 유지하던 그녀를 받아준 곳 역시 두리홈이었다. 딱한 사정을 접한 두리홈에서 신씨를 후원자개발팀 인턴으로 채용한 것.

“넉넉한 형편이 아닌데도 물품을 후원하고 기부하는 분들을 보면서, 앞으로 더 많이 나누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여섯 살배기 아들도 구세군 자선냄비가 보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해요. ‘종이돈’ 달라고 하면서 꼬박꼬박 기부합니다. 저와 제 아들이 이렇게 건강하게 함께 할수 있는 것도, 빨간 냄비에 모인 나눔 덕분이니까요.”

◇100년간 식지 않은 자선냄비… 한국의 나눔 역사 이끌다

비단 신씨만이 아니다. 1908년 한국에 첫발을 디딘 구세군은 지난 100년간 갈 곳 없는 이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해왔다. 정미선 구세군 사관(홍보실장)은 “전쟁 직후 ‘구세군이 제공한 무료급식을 먹지 않은 이가 없다’고 할 정도로, 한국 역사와 함께 성장해왔다”면서 “그 중심엔 한국의 나눔 문화를 이끈 자선냄비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1928년 서울 명동에서 첫선을 보인 구세군 자선냄비는 지난 86년간 매해 겨울마다 쉬지 않고 뜨겁게 끓었다. 848원으로 시작된 모금액은 해마다 증가해, 지난해 97억원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지난해 자선냄비에 모인 기부금 약 100억원은 어떻게 쓰였을까. 양승웅 구세군 사관(배분심의실장)은 “올해는 세월호로 인해 긴급구호 지원액이 가장 많았다”면서 “매년 구세군 산하기관들로부터 사업계획서와 결과보고서를 받으면, 매주 월요일 배분회의, 매주 화요일 재정회의를 거쳐 현장의 필요에 따라 지원된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자선냄비로 모인 전 국민의 기부금은 후생원, 지역아동센터, 노인복지관, 주간보호센터, 여성의집, 장애인시설, 두리홈 등 전국 600여개 시설로 배분·지원되고 있다. 이렇게 배분된 돈이 긴급구호·위기가정 사업(27억), 아동·청소년 사업(18억), 지역사회 역량강화 사업(13억), 노인·장애인 사업(8억), 해외 및 북한지원 사업(6억), 여성·다문화 지원사업(5억), 사회적 소수자 지원사업(4억) 순으로 사용됐다.

100년에 걸쳐 전국 곳곳의 기관들과 협력해온 만큼, 지역 주민들과의 밀착도도 높다. 양 사관은 “역사적으로 구세군 산하 기관들은 도서관·문화센터·복지관 등 지역 주민들이 원하는 공간 형태로 발전시켜왔다”면서 “구청이나 동사무소에서 마을별로 도움이 필요한 가정을 새롭게 발굴할 때, 구세군 산하기관들에 먼저 연락할 정도로 신뢰도가 높다”고 덧붙였다. 백내장, 고혈압, 당뇨에 우울증과 치매까지 겹쳐 방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이영순(가명·70)씨는 지인의 소개로 구세군 산하 치매주간보호센터를 다닌 뒤로 눈에 띄게 밝아졌다. ‘죽고 싶다’, ‘가만 놔둬라’ 등 부정적이고 우울한 모습을 보였던 이씨는 7~8개월 만에 우울감이 사라지고 혼자서 일상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호전됐다. 이씨의 딸은 “치매주간보호센터를 중심으로 한 이웃들의 관심과 치료가 우리 가족의 삶을 바꿨다”고 말했다.

◇사회의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간 나눔, 더 큰 열매를 맺다

모금의 역사가 긴 만큼, 구세군 자선냄비의 수혜자들이 후원자로 자라난 나눔의 선순환 사례도 많다. 국내 대형 은행 지점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박근후(가명·55)씨는 “후생원에서의 삶이 나의 인생을 바꿨다”고 회상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그는 1972년 아동복지시설인 구세군 후생원에 들어갔다. 생선을 팔며 근근이 자식을 키우던 어머니가 후생원 원생 보모로 일하게 됐기 때문.

“후생원엔 90년 전통의 유명 브라스밴드가 있습니다. 아동 한 명당 악기 하나씩 가르쳐, 전문 연주 교육을 받을 수 있었죠. 실제로 연주자나 음악교육가로 성장한 이들도 많습니다. 저 역시 초등학교 6학년 때 트롬본을 배워 40일간 유럽 순회공연을 했는데, 넓은 세상을 보고 꿈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박씨는 당시 평생직장으로 꼽히던 은행원을 목표로 공부했고, 78년 은행에 입사했다. 박씨는 3년 전부터 은행 취업을 원하는 후생원 학생 3~4명의 멘토를 자처해 교육·상담을 진행했고, 실제로 그중 한 명이 지난달 박씨가 근무하는 은행에 입사하는 열매를 맺었다. 그는 자신이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15년째 후생원 아동을 남모르게 후원하고 있다. 3년 전부턴 캄보디아 학생과 일대일 결연도 맺었다. “제가 어렸을 땐 영국 후원자로부터 도움을 받았는데, 이젠 다른 아이들을 후원할 수 있게 돼서 정말 감사합니다.” 1918년 설립 이래, 박씨처럼 후생원을 거쳐간 아동들은 1500명에 달한다. 김기석 구세군 사관은 “구세군은 우리 사회의 가장 낮은 곳을 찾아가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한다”면서 “오늘도 거리 곳곳에 놓인 자선냄비는 여러분의 따뜻한 나눔을 기다리고 있다”며 관심을 부탁했다.

☞ 구세군 자선냄비, 이렇게 참여하세요!

올해도 어김없이 구세군 자선냄비가 2014년 거리캠페인을 시작했다. 65억 모금액을 목표로 전국 76개 지역에 자선냄비 360개가 설치됐다. 세종문화회관, 대한문, 명동 입구를 비롯해 서울역·혜화역·역삼역 등 주요 지하철역, 고속도로 톨게이트 등에서 자선냄비를 만날 수 있다.

전국의 모든 구세군 자선냄비에선 현금이 없어도 신용카드, 체크카드(티머니 교통카드 불가)로 나눔에 동참할 수 있다. 디지털 단말기에 카드를 대고, 2000원·5000원·1만원·1만5000원 중 기부 금액을 선택해 결제하면 된다. 카드 수수료 없이 모든 금액이 해당 카드사로부터 구세군에 전달된다. 자선냄비는 12월 연말에만 운영되지 않는다. 계좌이체나 ARS를 통해 언제라도 정기·일시 후원에 참여할 수 있다. 기업 기부 및 물품 후원도 가능하다.

◇인터넷 후원(www.jasunnambi.or.kr)

◇ARS 후원: 060-700-9390(통화당 2000원)

◇계좌 후원: 우리은행(142-159080-13-122), 우체국(010041-01-050499), 국민은행(011237-04-007113)/예금주: 구세군자선냄비본부

◇자선냄비 설치 장소(서울): 새문안교회 앞, 동아일보 앞, 세종문화회관, 현대해상, 장통교, 오간수교, 대한문,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합정역, 신길역, 서울역, 남부터미널역, 안국역, 건대입구역, 홍대입구역, 서울대입구역, 종로3가(3호선), 혜화역, 선릉역, 역삼역, 현대백화점(목동점·삼성점·미화점·압구정점·무역센터점), 여의도역, 삼성역, 갤러리아백화점, ABC마트, 강남역, 교대역, 고속버스터미널, 롯데백화점(명동점·미아점·상계점·영등포점), 명동 입구, 밀리오레(명동역 지하), 우리은행(명동), 수내역, 분당야탑, 삼성역, 잠실 롯데월드, 김포공항역, 화곡역, 강변역, 종각역 1번출구 옆 우리은행, 종각역 4번출구 옆 파리바게뜨, 공덕역(5호선), 왕십리역(2호선), 신설동역, 신당역, 상봉역, 망우역, 광장시장, 충정로역, 서울시립미술관 앞, 미8군, 연대 앞, 천호동 이마트 앞, 청량리 광장, 서울역 광장, 회현역, 시청역, 용산역 신역사 건물, 신촌역, 종각 지하도(밀레니엄프라자·영풍문고 앞), 광화문 지하도, 사당역 지하도, 신림역, 천호역

정유진 기자

정수연 인턴기자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