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월)

가해자 처벌이 능사? 피해자 회복으로 사법 패러다임 바꿔야

이재영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원장

가해학생, 피해자 아닌 판사 앞에서 사죄
정작 책임 인정하고 뉘우칠 기회는 없어

피해자 “너 때문에 죽을만큼 힘들었다”
가해자 “하지 말았어야 할 일… 정말 미안”
처벌보다 회복에 중점 둬 만남의 장 마련

“같은 반 친구에게 1년 넘게 폭행을 당해오던 고등학생 친구가 있었어요. 맞은 친구는 집이 워낙 가난했고, 때린 친구는 잘사는 편이었어요. 자기 집으로까지 불러서 입 틀어막고 때리거나 담뱃불로 지지기도 하고, 밤마다 불러내서 폭행하기도 하고요. 맞은 친구는 워낙 오랫동안 피해에 젖어서 신고할 힘이 전혀 없는 상태였어요. 우연히 알게 된 다른 친구가 신고한 경우였는데, 피해자 아이는 무조건 ‘최대한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어요. 상담 치료도 시작됐지만, 그간 억눌렸던 게 분노로 표출되면서 벽에 머리를 찧거나 교사한테 심하게 반항하기 시작했어요. 가해자 부모는 매일같이 집으로 찾아가서 ‘돈을 줄 테니 합의해달라’고 요구했는데, 피해자 친구 아버지가 몰래 합의한답시고 돈 받았던 게 이 친구 내면 분노를 심화시켰어요.”

이재영(42) 한국평화교육훈련원 원장은 2010년 가정법원에서 도입한 ‘소년 화해 권고 프로그램’을 통해 구형 전 단계에서 이 피해 학생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죽어도 가해자 안 만나겠으니 감방 보내라”는 학생을 설득했다고 한다. “가해자 친구가 가장 강력한 처벌을 받는다고 네 마음이 풀릴 것 같으냐. 네가 그 친구 앞에서 용기를 내야 네 삶을 다시 정리해나갈 수 있을 거다. 정 용기가 안 나면 글로 적어 와도 된다”고 했다. 당일 피해 학생은 편지를 써 와서 앞에 나가 한 글자씩 읽기 시작했다.

지난 1일, 서울 한 중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회복적 정의 워크숍’을 진행한 후 만난 이재영 원장은 “학교폭력 외에도 사회 내 일어나는 무수한 갈등을 풀어나갈 때에, 처벌이 아닌 ‘피해자 상처와 공동체 회복’에 초점을 둬야 한다”며 “우리 사회 내에 흑·백이 아닌 ‘회색분자’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주선영 기자
지난 1일, 서울 한 중학교 교사들을 대상으로 ‘회복적 정의 워크숍’을 진행한 후 만난 이재영 원장은 “학교폭력 외에도 사회 내 일어나는 무수한 갈등을 풀어나갈 때에, 처벌이 아닌 ‘피해자 상처와 공동체 회복’에 초점을 둬야 한다”며 “우리 사회 내에 흑·백이 아닌 ‘회색분자’들이 많아져야 한다”고 했다. /주선영 기자

“네가 주먹으로 강타할 때마다 너를 죽여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고. 정말 수치스럽고 죽고 싶었는데, 도망칠 수도 없었다. 화가 쌓이니까 감당이 안 돼서, 스트레스가 쌓이고 학교에선 반항하게 됐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눈물바다가 됐다. 가해 학생은 고개도 못 들고 어깨를 들썩이며 울면서 “정말 하지 않았어야 할 일을 해서 너무 미안하다”고 했고, 가해 부모도 “너무 미안하다”며 “가능하다면 그 기억을 빼내주고 싶다”고 사과했다. 담임 교사도 “네가 트라우마로 아직 고통받는 줄 모르고 징계 운운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피해 학생이랑 가해자랑 대면시키겠다고 했더니 “미쳤느냐”며 팔팔 뛰었던 상담사도 “상담으로 좋아진 줄만 알았는데, 그냥 덮어두고 많이 좋아졌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고 했다.

“범죄라는 게, 내가 내 삶의 통제력을 잃는 거예요. 그런데 이렇게 진짜 용기를 내서 자신을 직면하고 가슴속 말을 하는 것을 통해서 아이는 다시 삶의 주체성을 얻는 거예요. 자기가 피해자라는 정당성도 확보되니, 이후 합의도 원만하게 되고요. 가해 아이도 자신이 스스로 책임을 지겠다고 인정하게 됐죠. 가해자도 피해자도 결국은 우리 사회에서 살아가야 할 구성원인데, 선 긋고 분리해 처벌하고 끝날 게 아니라 가해자에게도 자신이 한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뉘우칠 기회를 주고, 피해자가 입은 상처를 뱉고 공감받게 해서, 결국은 우리 사회가 그들을 포용하고 가야 합니다.”

이 원장은 미국 이스턴메노나이트대학(EMU)에서 ‘갈등분쟁전환학’을 전공하고, 국내에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에 기반을 둔 갈등 해결 방법을 도입·교육하는 갈등 조정 분야의 전문가다. 2007년부터는 서울경찰청 의뢰로 ‘피해자·가해자 대화 모임’을 시범 운영하기도 하고, 2010년부터는 서울가정법원 소년화해권고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현재는 교사와 학생들을 대상으로 학교 폭력을 평화롭게 해결해나가는 방안을 교육하고 있다. 그는 “처벌에 초점 맞춘 기존 ‘응보적 관점’이 아닌, 자발적 책임과 관계 회복, 피해자 회복을 중심으로 한 ‘회복적 정의’로 시각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회복적 정의’란 뭘까.

“만약 고등학생이 ‘학교 폭력’으로 기소됐다고 합시다. 판사 앞에 서면 싹싹 빌어요. 조금이라도 형을 줄여야 하잖아요. 정작 사과해야 할 피해자한테 미안하다는 게 아니라, 판사 권위와 사법 체계에 잘못을 비는 거죠. 피해자들은 마음이 편한가요? 전혀 아니죠. 분노가 솟구치고, 혹시라도 가해자를 다시 만날까 봐 두려운 기억이에요. 가해자가 처벌받는 것과, 피해자의 상처가 아무는 건 다른 문제입니다. 정작 전학 가는 건 피해자고, 가해자는 ‘재수 없어서 걸렸다, 형이 길다’며 억울해해요. 이게 가해자 처벌에 초점 맞춰진 현 사법 체계의 한계입니다. 기존 사법 체계는 ‘누가 범인인지’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요. 그렇게 해보니 가해자가 처벌을 받았다고 해도, 피해자가 가진 트라우마와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더란 겁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속해 있었던 공동체도 이전처럼 회복되지가 않고요. 처벌에 초점이 있던 이전 시각을 ‘응보적 정의’라고 본다면, 이제는 공동체와 피해자의 상처를 ‘회복’시키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는 게 ‘회복적 정의’예요. ‘누가 피해자이고’ ‘어떤 피해가 발생했고’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당사자가 만나 대면해서 이야기하게 하는 거죠.”

1974년 캐나다를 시작으로 현재 호주, 핀란드, 영국, 칠레, 터키, 태국 등 40여 국가에서 최소 청소년 문제를 다룰 때만큼은 ‘회복적 정의’가 대세라고 한다. UN 또한 청소년 문제를 넘어 범죄 예방 및 형사법 개혁에서도 ‘회복적 정의’를 대안으로 할 것을 권고했다. 2007년 우리나라에서도 청소년 문제에서 ‘피해자·가해자 대화 모임’을 만들었고, 2010년 서울가정법원에서도 ‘회복적 정의’에 기반을 둔 ‘소년 화해 권고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했다. “뒤늦은 개입으론 한계를 느꼈다”는 이 원장은 학교로 들어갔다. 소송 단계까지 가기 전,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폭력을 좀 더 평화로운 방법으로 풀어내기 위해서다. 3년 전, 남양주 관내 청소년상담복지센터와 연이 닿아 200여 학교에 ‘피해자·가해자 화해 프로그램’을 전달한 것을 시작으로, ‘평화 교육’에 관심 있는 일반인, 교사, 지역 주민 등에게 워크숍 등을 통해 ‘회복적 정의’ ‘회복적 생활 지도 방법’ 등을 알리고 있다.

“불필요한 소송이 넘치고, 비용이 나가고, 관계가 깨지는 사회는 건강하지 않고, 오래갈 수가 없어요. 잘못에 벌을 받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서로 공감하고, 이해하고, 반성하고, 용서할 기회는 주어져야 하는 거죠. 도시 곳곳, 구역마다 ‘회복적 정의센터’ ‘공동체 평화센터’ 같은 곳이 생겨서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공동체를 살리는 사회를 만드는 게 제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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