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일)

ESG 유행 끝?… 美·EU 엇갈린 해석에도 “본질은 바뀌지 않을 것”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CEO 래리 핑크가 최근 ‘ESG’ 용어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미국과 유럽에서 ‘반(反)ESG’ 정서가 형성되고 있다. 래리 핑크는 지난 6월 아스펜 아이디어 페스티벌(Aspen Ideas Festival)에서 “ESG 담론이 개인의 정치에 이용되면서 사회가 양극화되는데 일조했다”고 말했다. 지난 2018년부터 공개적으로 ESG 경영을 강조해온 그가 기존 노선을 벗어난 행보를 보이면서 미국에서는 반ESG 법안이 잇따라 발의됐고, 유럽에서는 ESG 정책에 따라 선거 결과가 달라지는 양상까지 나타났다.

반ESG 지지 세력은 화석연료·무기 산업에 투자하는 것을 옹호하고, 환경·사회·지배구조 같은 비재무적 요인보다 재무적 요인을 강조한다. 블랙록은 지난달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기업 아람코의 아민 나세르 CEO를 이사회에 합류시켰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기후위기 대응 활동이 축소될 것이란 비판 여론과 반ESG 움직임에도 지속가능경영의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사진설명] 미국 내 반ESG 공세를 주도하는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AP 연합뉴스
미국 내 반ESG 공세를 주도하는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 /AP 연합뉴스

ESG, 美서 정치적 도구로 전락

미국에서는 정치권을 중심으로 ESG 회의론이 크게 부상하고 있다. 반ESG 움직임을 주도하는 세력은 보수진영인 미국 공화당이다. 지난 3일(현지 시각) 미국 공영방송 NPR과 여론조사업체 마리스트가 발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주당원 80%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것이 경제 활성화보다 중요하다”고 응답했지만, 공화당원의 72%는 “이상기후를 초래하더라도 경제 활성화가 우선돼야 한다”고 응답했다.

외신을 종합하면 지난해 말 기준 미국 전역에서 반ESG 법안 39개가 발의됐고, 주 정부 9곳에서 법안이 통과됐다. 반ESG 법안의 골자는 ESG 투자를 금지하고, 투자 대상에서 화석연료·총기 관련 기업을 배제하는 금융기관과는 거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민주당 강세인 미국 해안 지역에서는 ESG 활동을 더 독려하는 친(親)ESG 법안이 발의됐다. 반면 공화당이 강세인 내륙 지역에선 반ESG 법안이 대거 상정됐다. 실제 공화당 세력이 집권하고, 화석연료·석유 산업의 기반이 되는 플로리다와 텍사스는 반ESG 행보를 구체화하고 있다.

지난달 1일부터 미국 플로리다주에서는 ESG 투자를 규제하는 주법이 시행됐다. 법안에는 ESG채권 발행을 금지하고, 플로리다주와 지자체 기관은 ESG같은 비재무적 요인이 아닌 재무적 요인을 고려해 투자를 결정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겼다.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는 강경한 반ESG파로, 지난해 12월 ESG 투자를 주도하는 블랙록으로부터 20억달러(약2조5000억원)의 주 기금을 회수하기도 했다. 디샌티스 주지사는 지난 2월 발간한 저서 ‘자유로워질 용기(Courage to be Free)’에서 “ESG는 극진 좌파의 쓰레기”라 맹비난했다.

텍사스주는 지난해 8월 “에너지 관련 기업을 투자에서 배제한다”는 이유로 블랙록과 골드만삭스, JP모건 등 10개 기업과 348개 투자펀드를 공적연금의 출자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텍사스는 엑손모빌 등 주요 에너지 및 군수 기업의 본거지로 금융기관들의 ESG 활동과 직결되는 지역이다.

이밖에도 켄터키·루이지애나·미주리 등 각 주들이 반ESG를 선포하고 나서자 현지 전문가들은 ESG를 거부하는 행태가 되레 경제적 손실을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국제신용평가기관 DRBS모닝스타의 공동대표인 토마스 톨거슨은 “플라리다주는 특히 이상기후를 자주 겪는 지역인데 지자체가 반ESG 법안을 도입해 신용평가 기관의 접근을 막는다면, 그 주의 신용평가 등급은 자연스레 강등될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네덜란드 농민시민운동당(BBB·BoerBurgerBeweging)의 당대표 캐롤라인 반 데르 플라스가 기자회견 중이다. /BBB
네덜란드 농민시민운동당(BBB·BoerBurgerBeweging)의 당대표 캐롤라인 반 데르 플라스가 기자회견 중이다. /BBB

EU, 각국의 ESG 강경 정책에 반작용

반ESG 바람은 유럽에서도 거세게 불고 있다. 다만 전개 양상은 미국과 다르다. 유럽의 경우 각국의 강경한 ESG 정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모양새다. 대표적인 사례는 지난 3월 15일 치러진 네덜란드 지방선거에서 농민시민운동당(BBB·BoerBurgerBeweging)이 압승을 한 것이다. BBB는 2019년 네덜란드 정부의 강경한 친환경 정책에 반기를 들고 농촌에서 지지기반을 확보해온 신생 정당이다. 지난 선거에서는 BBB가 12개 선거구 중 8곳에서 승리를 거뒀다.

앞서 네덜란드 정부는 2030년까지 질소배출량을 절반으로 줄이기 위해 전체 축산 농가의 가축수를 최대 50%까지 감축하고 농장을 폐쇄하는 등의 정책을 내세웠다. 낙농·축산업으로 생계를 이어온 농민들은 거세게 항의했고, 당시 반대 시위를 이끌었던 BBB가 지방선거에서까지 승리하게 된 것이다.

유랙티브·가디언 등 현지 매체들에 따르면 지난달에는 유럽의회의 녹색당·사회당·민주당 등이 기업지속가능성보고지침(CSRD)를 수정하면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EU는 5만 개의 상장 기업이 2024년부터 연간 보고서에 ESG를 공개하도록 강제하는 CSRD를 발표한 바 있는데, 이에 반대하는 세력이 지침 내용을 완화하는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결국 EU 집행위원회는 750인 미만 기업에 한해 공시 보고서에서 스코프3 등 일부 자료를 생략할 수 있도록 수위를 낮췄다. 이에 유럽의회 의원인 폴 탕(Paul Tang)은 “반ESG 움직임이 유럽에서도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며 “EU의 친환경 정책이 되레 퇴보할까 우려된다”고 했다.

“ESG 펀드 투자 금지, 경제적 손실 초래할 것”

반ESG 움직임으로 기후변화 대응이 후퇴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미국 비영리단체인 ‘참여과학자연합(Union of Concerned Scientists)’ 소속 기업분석가인 로라 피터슨은 “이제 기업들은 탄소중립 달성 목표보다는 석유·가스 제품 생산량을 증진하는 계획을 세울 것”이라며 “글로벌 기후위기 현상에 역행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신시아 하나왈트 컬럼비아대학교 사빈기후변화법센터(Sabin Center for Climate Change Law) 선임연구원은 미 종합경제지 ‘포춘’에 실린 논평에서 “반ESG 세력은 기후가 경제와 사회 전반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력을 간과하고 있다”며 “기후변화가 가져오는 자연재해 피해는 결국 미국 시민들이 부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최근에는 미국의 반ESG 정책이 경제적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나왔다. 국내외 경제·금융시장 동향을 분석하는 자본시장연구원은 ESG 정책을 가진 은행이 반ESG 법안을 도입한 지역의 지방채 시장에서 쫓겨나면 경쟁자가 사라진 지역은행들이 더 높은 차입비용(수수료 혹은 이자)을 설정한다고 분석했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텍사스에서 반ESG 법안이 통과된 이후로 씨티그룹·JP모건·골드만삭스·피델리티 등이 지방채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연간 약 4억1600만달러(약 5370억원)의 추가 차입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ESG 행보를 이어나가는 플로리다·루이지애나주에서도 지방채 금리 상승으로 최소 2억6000만달러(약3360억원)에서 최대 7억달러(약 9040억원)의 비용이 발생할 것으로 추정된다.

높은 금리로 지방채 발행 조건이 악화하면서 각 주는 납세 비용을 올릴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미국의 비영리단체 ‘선라이즈프로젝트(sunrise project)’ ‘애즈유소우(As You Sow)’ ‘세레스(Ceres)’가 지난해 6월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텍사스주는 지방채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납세자에 3억3000만~5억3200만달러(약 4290억~6870억원) 비용을 부담할 것이라 추정된다. 보고서를 작성한 한 연구원은 “반ESG 법안을 도입해서 ESG펀드를 보유한 은행을 내쫓는 것은 결국 지역주민에게 경제적 피해를 줄 수 있다”며 “전혀 지속가능하지 않은 방법”이라고 비판했다.

“지속가능경영의 본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한국 기업들은 ESG 경영 가속화에 힘을 싣는 분위기다. 지난 두 달간 주요 대기업들은 ESG 성과를 담은 지속가능경영보고서를 연이어 발간했다. 최근 대기업들은 ESG 역량이 부족한 중소·중견기업을 위해 협력사 지원 프로그램도 운영하는 흐름이다.

전문가들은 ESG 찬반 양론이 대립하고 있지만 국내 기업들은 흔들림 없이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인형 자본시장연구원 동향분석실 선임연구위원은 “이제 ‘ESG를 잘하는 기업에 투자하면 초과수익이 난다’는 믿음은 사라진 것 같다”면서도 “전 세계적으로 기후변화 문제가 심각한 현재 상황에서 ESG를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어 “기후위기로 인한 위험요인과 기회요인은 점점 커지고 있고, 중대재해법 처벌이나 공정거래 이슈 등 다양한 외부적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라며 “장기적으로 봤을 때 ‘ESG’라는 표현은 사라질 수 있으나 지속가능한 경영을 목적으로 기업을 운영한다는 본질 자체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석 경기도사회적경제원 사업본부장도 “그간 ESG 관련해 거품도 많았는데, 회의론이 나오면서 다양한 논쟁·토론이 진행되고 그 과정에서 거품이 씻겨 내려갈 것이라는 기대도 있다”며 “ESG라는 용어에 매몰되기 보다는 ‘지속가능경영’ 기조를 계속해서 유지해나가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김수연 기자 yeo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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