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4일(화)

신고 폭증·예산 삭감·상담원 줄사표… 아동 학대 특례법, 왜 만들었나요

학대 받는 아동, 홀대 받는 보호기관
‘아동학대는 범죄’란 취지로 특례법 시행… 신고 건수 늘었지만 상담원 수는 그대로
기관당 3억으로 하향 평준화된 예산… 지자체 1억 5000 이상 지원할 이유 없어져

‘아동 학대는 더 이상 사소한 가정 문제가 아니라 명백한 범죄다. 이제 아동 학대 사건은 국가 공권력이 개입한다.’

이런 취지를 담은 ‘아동 학대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하 아동 학대 특례법)이 29일 드디어 시행됐다. 울산 울주군 서현이 사건(작년 10월)과 칠곡 계모 사건(올 4월)으로 떠들썩한 지 반년 만이다. 아동 학대 신고가 접수되면 경찰과 아동보호전문기관 상담원은 5분 내 즉각 현장에 출동해야 한다. 피해 아동과 학대자를 분리하고, 의료기관이나 보호시설로 데려가는 등 적절한 응급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후 판사는 아동 학대자의 접근을 제한하는 것은 물론, 아동 학대로 중상해를 입혔거나 상습범에 대해서는 친권을 박탈할 수 있다.

가해자 형사처벌도 가능해졌다. 법 시행을 앞둔 지난 22일, 서울가정법원은 검·경, 지자체, 아동보호전문기관, 가정위탁센터, 국선 보조인 등 관계기관 간담회를 열었다. 법무부는 “사법기관이 아동 학대 가해자 처벌뿐만 아니라 피해 아동 보호에도 적극 나서게 됐다”라고 밝혔다. 과연 이제 우리나라의 아동 학대 문제는 해결의 첫 단추를 채운 것일까. 현장의 답은 “전혀 아니다”이다.

미상_사진_아동학대_학대받는아동_2014
아동보호전문기관 한 상담팀장은 “아동 학대 특례법 시행 직전엔 신고 사례가 폭증해, 밤, 낮, 새벽 없이 주당 90시간씩은 일하고 있다”며 “현장 상담원들은 전부 나가떨어지기 직전”이라고 했다.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들이 “3교대 하는 경찰과 동시출동 하려면, 최소 기관당 상담원 15명은 돼야 아동보호체계가 정상 작동한다”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죽어나는 현장… “더 이상은 못 한다”

“정부한테 한번 묻고 싶어요. 아동 학대 보호한다고 말은 해놓고 대체 뭘 하느냐고.”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 현장 관계자 A씨의 말이다. 법 시행을 앞두고 아동보호전문기관은 초비상이 걸렸다. 아동 학대 신고 건수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경찰이 “사소한 가정 내 문제”라며 덮고 넘어가던 사건도 이제 “아동 학대에 해당한다”며 모두 신고한다. 전년 대비 1.5배까지 늘어난 곳도 있다. 신고 건수가 늘면서 현장 상담원들은 초죽음이 되고 있다. 기관당 평균 상담원 수는 6명뿐. 신고할 때마다 경찰과 함께 출동해야 하고 검·경에 넘겨야 하는 서류만 해도 4배나 늘었다. 아동보호전문기관 한 곳당 경찰서·파출소는 평균 50곳이다.

“부모가 아이를 학대했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경찰관과 상담원 2명이 함께 현장에 출동합니다. 응급조치 결과보고서를 써서 경찰서에 냅니다. 이후 아동과 부모를 분리하는 결정이 내려지면, 피해 아동 국선 보조인 선정 신청, 피해 아동 보호명령 청구, 의견 진술, 피해 아동 보호명령 집행, 임시 후견인 임무 수행, 학대 행위자 상담 교육 집행, 결과보고서 작성, 학대 행위자 친권 상실이나 제한 신청, 학대 행위자 긴급 임시조치 신청, 피해 아동 응급조치 등 온갖 일을 처리해야 합니다. 전산 입력도 계속해야 하고요. 법 시행 이전에 없었던 업무가 이렇게 많아져서 야근은 말할 것도 없고 토·일요일 포함해 주당 72시간 이상 일합니다. 경찰서는 교대 근무라도 하지만, 우리는 밤새워 일해도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아요.”

“더는 못 견디겠다”며 현장을 떠나는 상담원도 줄을 잇고 있다. 한 아동보호전문기관 관계자는 “현장에서 사직서가 매일 올라와서 지난 주말에는 잠이 오지 않았다”며 “특례법이 시행되면 상담원이 최소 15명으로 늘 것으로 예상했는데, 사명감만으로 일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고 말했다.

미상_그래픽_아동학대_아동학대정치권말말말_2014

◇늘기는커녕 후퇴하는 학대 아동 보호 예산

문제는 내년에도 상황이 전혀 개선될 기미가 없다는 점이다. 지난 18일 발표된 내년의 아동 학대 예산이 오히려 ‘하향 평준화’됐기 때문이다. 내년도 예산안에 따르면, 정부는 현재 50개인 아동보호전문기관을 56개까지 증설하고 한 기관당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일대일로 부담해 3억원씩 지원한다는 계획이다. 이렇게 되면, 예산이 오히려 몇 억원씩 깎이는 아동보호전문기관도 생긴다.

실제 충북의 경우 2013년 한 해만도 3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11억6000만원을 지원했지만, 내년 예산안이 통과될 경우 3개 기관에 4억5000만원(기관 1곳당 1억5000만원)만 지원하면 된다. 국비 지원이 더해져도 3곳 아동보호전문기관 예산은 9억원이다. 최소 86명의 상담원을 채용할 수 있는 인건비가 날아가는 셈이다. 작년 10개 아동보호전문기관에 도비 26억9000만원을 지원했던 경기도의 경우, 15억원만 지원하면 된다.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일대일로 매칭하는 사업이기 때문에, 재정이 바낙난 지방정부는 최소 금액인 1억5000만원 이상을 지원할 유인이 없어졌기 때문.

지역 아동보호전문기관 한 관장은 “지난 수년 동안 지자체 담당 공무원을 설득해 예산을 조금씩 늘려 확보해 왔음에도, 인력과 예산이 턱없이 부족해 민간기관에서 매년 수억원씩 들이부어 왔다”며 “예산안대로라면 내년부터 2억원 가까이 보조금이 줄어드는데, 상담원을 해고하든지 민간 법인에서 알아서 돈을 더 들이붓든지 하라는 거 아니냐”고 했다. 이 관장은 “2005년부터 지방으로 이양됐던 아동 학대 예산을 내년부터 중앙정부 사업으로 국고 환원한다고 해서 환영했는데, 뚜껑을 열어 보니 기존 지자체 지원 수준보다 하향 평준화를 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도 덧붙였다. 내년도 국고에 환원되는 장애인(4085억원), 노인(320억원), 정신요양시설(725억원)이 복지부 일반회계 예산으로 책정된 데 반해, 아동 학대 예산(169억원)은 범죄피해자보호기금(법무부)으로 잡혀져 예산이 더 늘어날 가능성도 낮다.

2014년 8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가정폭력 및 아동 학대 예방 캠페인’에서 가족들이 티셔츠에 적힌 문구를 보며 지나가고 있다. /이경원 인턴기자(중부대 사진영상학과 3년)
2014년 8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계광장에서 ‘가정폭력 및 아동 학대 예방 캠페인’에서 가족들이 티셔츠에 적힌 문구를 보며 지나가고 있다. /이경원 인턴기자(중부대 사진영상학과 3년)

◇공약 쏟아내던 정치인들은 어디로

아동보호전문기관을 위탁 운영하는 한 민간단체 관계자는 “대통령도 한마디하시고, 정치인들도 앞다투어 ‘아동 학대’에 대해 이야기하고, 지난 6~7월경엔 복지부 장관이며, 기재부 관계자며, 국무총리실이며 너 나 할 것 없이 아동보호전문기관 현장도 다녀가서, 현장에선 ‘특례법 시행 맞물려 올해는 뭔가 바뀌겠구나’하는 기대감이 컸다”면서 “‘조금만 기다리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독려해왔는데 이젠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올해 초 아동 학대 사망 사건이 잇달아 터지면서, 정치권에서는 대책 마련과 관련한 약속들이 쏟아져 나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4월 15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우리 아이 한 명 한 명을 잘 키워내는 일이 우리 미래를 위해 중요한 일인 만큼 아동 학대는 더 이상 가정의 문제가 아닌 명백한 사회 범죄 행위”라고 밝혔다. 현 기획재정부 장관이자 경제 부총리인 최경환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4월 9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아동 학대는 결코 묵과할 수 없는 범죄”라며 “아동 학대 예방 대응 체계를 면밀히 구축하고, 아동 학대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입법과 제도 정착에 힘쓰겠다”고 했다. 정부와 새누리당의 ‘아동 학대 대책 마련을 위한 당정협의’, 새정치민주연합 아동학대방지 및 권리보호 TF 구성, 국회 내 ‘아동 학대 방지 특위’ 설치 제안 등이 이어졌다. 그러나 5개월이 지난 지금, 뜨겁게 타오르던 대책 논의는 온데간데없다.

이에 아동보호전문기관을 위탁 운영하는 12개 민간단체는 지난 25일 “정부에 아동 학대 예방을 위한 의지가 있는지 실망스럽다”고 공동성명서를 냈다. 단체들은 ▲아동보호전문기관 운영지원 예산을 원안인 322억원 수준으로 증액 ▲아동보호전문기관 1곳당 최소 15명의 상담원이 확보되도록 예산 책정 기준 재검토 ▲학대 피해 아동 긴급쉼터 현재보다 2배 이상 확충 ▲아동학대 예방 예산 재원을 범죄 피해자 보호기금에서 일반회계로 변경 등이 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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