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7일(화)

[Cover Story] 영국 런던 예술가들의 화려한 부활

예술, 버려진 공간에 숨을 불어넣다
런던 폐공장 단지, 400명 예술가 작업실로
지역 공동체 위한 프로젝트 참여하면
일반 임대료보다 60% 저렴한 공간 제공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한 낡은 교회
학교 범죄율 낮추고 약물중독자 치료 돕기도

서울 ‘홍대 앞’은 더 이상 예술가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값비싼 임대료를 감당 못하는 예술가들은 점점 홍대 외곽으로 밀려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물가가 비싸다는 영국의 수도 런던. 이곳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살아남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청년 사회적기업 ‘에이컴퍼니’와 함께 2014년 8월 14일부터 10박 11일 동안 런던 탐방에 나섰다. 에이컴퍼니는 대중에게 신진 작가의 예술작품을 알려 구매하도록 돕고, 이를 통해 신진 작가들의 자립 기반을 만드는 사회적기업이다. 또한 서울시 종로구 동숭동의 한 주택을 임대해 갤러리 ‘미나리하우스’도 운영하고 있다. 미나리하우스는 갤러리 겸 게스트하우스(여행자 숙소)로 운영되며, 작업 공간이 필요한 신진 작가에게 6개월간 무상으로 레지던스를 빌려주고 있다. 특히 이번 탐방은 미나리하우스의 런던점 진출을 모색하고자 마련된 것. 이 사업은 생명보험사회공헌위원회와 한화생명이 후원하고, ㈔씨즈가 주최한 ‘씨커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청년들에게 국내외 사회적기업의 혁신 사례 탐방을 4년째 지원하고 있다. 편집자 주

 

 (맨위에서부터 아래 좌·우, 맨끝 사진설명) ①SFSA의 스튜디오는 건축·회화·도예별로 아티스트 작업실이 나눠져 있어, 예술가간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했다. ②지난달 20일 찾은 ‘코트렐 하우스’앞에서 런던 탐방 일정을 함께했던 한국의 사회적기업 ‘에이컴퍼니’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③아카바에 입주하려는 아티스트는 저렴한 임대료를 내는 대신, 사회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④600명이 일하던 플라스틱 공장이 예술가를 위한 공간으로 바뀐 SFSA의 전경. /김경하 기자

(맨위에서부터 아래 좌·우, 맨끝 사진설명) ①SFSA의 스튜디오는 건축·회화·도예별로 아티스트 작업실이 나눠져 있어, 예술가간 네트워크가 자연스럽게 이뤄지도록 했다. ②지난달 20일 찾은 ‘코트렐 하우스’앞에서 런던 탐방 일정을 함께했던 한국의 사회적기업 ‘에이컴퍼니’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③아카바에 입주하려는 아티스트는 저렴한 임대료를 내는 대신, 사회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 ④600명이 일하던 플라스틱 공장이 예술가를 위한 공간으로 바뀐 SFSA의 전경. /김경하 기자

◇런던의 예술가들, 플라스틱 공장을 접수하다

서울 구로 공단 같았다. 런던 수도를 가로지르는 템스 강 남동쪽 해링턴 웨이(Harrington way)에 위치한 대규모 공장 단지는 끝이 안 보였다. 겉모습은 공장인데, 굴뚝 연기도 기계음도 없었다. 건물의 정체는 예술가 400여명의 작업실. 건축·회화·도예 등 같은 분야 예술작가들이 건물별로 입주해있고, 아트 카페, 프린트 스튜디오, 교육 공간, 갤러리 등도 있었다. 원래 600명이 일하던 플라스틱 제조 공장이었으나, 런던의 탈공업화 정책에 따라 중국으로 공장이 이전하면서 생긴 유휴 공간이 이렇게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15년 전, 예술·미디어·디자인 분야에서 세계적 명성을 지닌 골드스미스(Goldsmith) 대학교를 졸업한 예술가 7명이 이 공장 2층 한편에서 작업을 하면서 시작된 변화다. 현재 이 건물을 운영하는 곳은 영국의 사회적기업 ‘SFSA(Second Floor Studios & Arts)’다. SFSA는 예술가들이 작품 활동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홍보에 필요한 인쇄물·도록 제작 등을 하는 일종의 매니지먼트 회사다. 입주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은 멤버십 비용으로 1년에 90파운드(약 15만원)를 내면, 일반 임대료보다 60%가량 저렴한 가격(평당 약 6만원)으로 공간을 제공받는다. 단, 조건이 있다. 반드시 지역 공동체에 도움이 되는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 매슈(Matthew) SFSA 디렉터는 “예술가들이 지역 공동체를 건강하게 만드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지역 정부·정치인에게 설득했다”고 했다.

매년 2회 열리는 오픈 스튜디오(Open Studio) 행사는 주요 활동이다. 스튜디오를 오픈해, 지역 주민들이 작품을 감상하고 예술가와 소통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지난해에는 A5 사이즈의 실제 작품을 단돈 20파운드(약 3만5000원)에 구매할 수 있는 ‘시크릿 스코어 카드’를 도입, 300명이 참여해 1400파운드(약 235만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 금액의 80%는 런던 내 자선단체 4곳에 기부됐다. 매슈 디렉터는 “예술가들이 좋은 창작물을 만들고, 대중과 만날 기회를 가지다 보면 유명 작가로 데뷔할 기회도 생기게 된다”고 했다.

◇지역 문제 해결사 ‘민와일 스페이스’, 비결은?

영국 런던은 마치 예술가들의 놀이터처럼, 담벼락과 지하철 역사, 공사 중인 가게 문에 ‘거리낙서’로 불리는 그래피티(Graffity) 작업이 많았다. 영국의 유명 거리예술가 뱅크시(Banksy)의 작품은 경매에서 최소 18억원이 넘는 가격에 팔린다고 한다. 하지만 런던의 신진 작가들도 우리나라처럼 배고프긴 마찬가지다. 1년에 1만2000~1만5000파운드(약 2000만~2500만원) 소득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수준이라고 한다. 작업실을 하나 마련하려면, 런던 중심가의 높은 물가에 떠밀려 남북으로 이동해야 하는 ‘철새’ 신세다.

하지만 최근 예술가들은 ‘사회적 가치’를 담은 프로젝트를 통해 부활하고 있었다. 이민자가 많이 몰린 런던 북서부의 브렌트구 웸블리(Wembley)는 15년 전만 해도 영국에서 가장 악명 높은 범죄 지역이었다. 런던시는 웸블리를 재개발지역으로 지정했고, 2007년 유럽에서 가장 큰 웸블리 스타디움 콤플렉스(축구경기장·대규모 쇼핑센터)를 만들며 환경 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도시계획에 힘입어 범죄율 1위의 오명은 벗었지만, ‘이민자 통합’은 브렌트구의 주요 고민이다. 브렌트구 인구의 82%가 유색(Non-white) 영국인이다. 브렌트구의 짐을 덜고 있는 것은 일종의 마을기업인 공동체 이익회사(Community Interest Company·CIC), ‘민와일 스페이스(Meanwhile Space)’다. 2009년 설립된 민와일 스페이스는 일종의 ‘공간 혁신’ 프로젝트를 한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민간으로부터 공간을 빌린 후, 이를 공동체를 위한 공간으로 ‘일시 활용’하는 것이다.

지난달 20일 찾은 ‘코트렐 하우스(Cottrell house)’가 대표적인 예다. 35년간 사용되지 않았던 자동차 전시장(car showroom)을 17개월 동안 빌려, 지역 주민을 위한 공간으로 쓰고 있었다. 아티스트 3명이 작업할 수 있는 스튜디오와 워크숍 공간, 개인 정액 회원을 위한 칸막이 사무실, 취약계층 여성이 일하는 식당(소셜키친)이 있고, 밖에는 지역 주민을 위한 탁구대가, 스튜디오 벽에는 예술가들의 창작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예술가들이 손을 대면, 공간의 가치는 높아진다.

마틴(Martin) 민와일 스페이스 디렉터는 “단기간이지만 예술가·대학생들이 지역 주민과 소통하면서, 커뮤니티 문제도 해결하고, 공간의 효용성 또한 극대화된다”면서 “지난 30년간 팔리지 않던 코트렐 하우스도 매매되면서 아파트로 재개발될 예정”이라고 했다. 이뿐 아니라 민와일 스페이스는 영국 왕립 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RCA) 건축학과와 협력, 대학생들이 웸블리 지역의 문제를 파악하고 해결 방안을 제안하는 ‘커뮤니티 워크숍’도 진행한다. 리사이클링, 이동식 주차장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이는 브렌트구에 지역 개선 보고서로 제출된다. 한 프로젝트가 끝나면 민와일 스페이스는 또 다른 공간을 찾아 프로젝트를 이어간다.

◇공간의 ‘진화’, 대중과 아티스트의 ‘친화’ 이룬다

“아티스트들이 모여서 작업하다 보니 시너지가 나고, 내 작품을 대중에게 보여줄 기회도 얻을 수 있어 좋아요.” 비주얼 아티스트 모레이(Morey)씨가 15년째 ‘아카바(ACAVA·Association for Cultural Advancement through Visual Art)’의 한 스튜디오에 입주해 창작 작업을 하고 있는 이유다. 1983년 설립된 아카바는 비주얼 아트의 성장을 도우며 문화예술 교육 사업을 벌이는 비영리단체다. 설립자인 덩컨(Duncan)씨 역시 아티스트다. 덩컨씨는 “아티스트는 대부분 자신의 작업에 매몰돼 대중과 일정 거리를 두는 경향이 있다”면서 “대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만큼, 사회적 역할이 중요하다”고 했다. 아카바는 오래된 학교, 공장, 교회 등 비어 있는 공간을 찾아 지역 정부를 설득해 공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냈다. 덕분에 기존 임대료의 30~40% 비용으로(월 40만~80만원) 공간을 제공할 수 있다.

긴 역사만큼, 입주자 선정 단계도 체계적이다. 아카바 스튜디오를 사용하고 싶은 예술가는 지원서에 자신이 관심을 갖는 사회 문제(보건·교육·소외계층 등)를 양식에 맞춰 기술해야 한다. 이 정보는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정부나 비영리기관 프로젝트와 매칭시켜, 예술가가 지역 사회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영국의 국가보건서비스(NHS·National Health Service)와 20년 동안 협력하며, 예술가들이 문화예술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해 정신질환자·약물중독자들의 회복을 돕는 것이 대표적이다. 예술가들은 이런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수입을 얻고, 그 대가로 공간 사용료를 내는 방식이다.

덩컨씨는 “작품 활동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예술가들은 소수에 불과하다”면서 “예술가와 지역사회 모두를 위해 지역 정부에서 공익적 공간 활용에 대한 정책적 차원의 지원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