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6일(목)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이서현 보고서’

이번호 커버스토리를 다루면서 울산 울주에서 계모의 학대로 사망한 8세 소녀 ‘이서현 보고서’를 읽었습니다. ‘제2의 이서현 사건’을 막기 위해 사건의 전개 과정, 제도적 문제점, 개선 방향을 정리한 한국판 클림비 보고서입니다. 2000년 빅토리아 클림비라는 아이가 아동학대로 숨졌을 때 영국 정부는 2년에 걸쳐 전문가들의 체계적인 조사 활동을 토대로 한 보고서를 만들고 이를 국회에 제출해 승인받았습니다. 하지만 이서현 보고서는 2개월 동안 민간위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해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왜 우리는 서현이를 살려내지 못했을까’를 짚어내는, 이른바 실패 연구집입니다.

사건 개요를 읽다 눈물과 분노, 안타까움이 일었습니다. 최초 신고를 받은 포항아동보호전문기관, 서현양 가족이 급히 이주했던 인천아동보호전문기관에 대해 “왜 아동을 격리 조치하지 않았느냐” “왜 적극 개입하지 않았으냐”고 비난할 수 있을까요. 학교, 유치원, 병원 등 신고 의무자에 대해 “왜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최선을 다해 서현양을 돌봤던 상담원 A씨는 사건 이후 경찰에 불려가고 각종 진상보고서를 만드느라 시달리는 등 갖은 고초를 치렀다고 합니다. 신고 의무자들 중 신고 의무자 교육이나 아동학대 예방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의사는 의과대학 시절 소아과 과목에서 학대 예방교육을 들은 게 전부요, 교사는 교사 양성 과정에서 학교폭력에 초점이 맞춰진 교육을 받았을 뿐 아동학대 인지 교육은 받지 못했고, 민간 학원은 본인이 신고 의무자인 줄도 몰랐다네요.

궁금해졌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과연 이 보고서를 읽었을까요. 역대 정부에서 아동정책은 늘 후순위였지만, 여성 대통령인 박 대통령은 좀 다를 걸 기대했습니다. ‘투표권이 없는’ 약자인 아동에겐 목숨 걸고 이익을 대변해줄 이익집단이 없습니다. 그래서 최고 정책 결정권자가 목숨 걸고 아동 권리를 지켜내지 않으면 늘 찬밥 신세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정부별로 지자체 예산이 활성화된 미국에서 아동예산만은 국가가 쥐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기자들에게 “정부를 비판할 때 ‘정부 예산을 늘려라’ 혹은 ‘정부가 다 책임져야 한다’는 식으로 기사를 쓰지 말라”고 말합니다. 예산이 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식이라면, 초울트라 공룡 정부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동문제에 관한 한 “정부 예산 늘려라”고 줄기차게 주장합니다. 매년 삭감을 반복하는 예산보다 오히려 안정적인 재원을 확보할 수 있는 기금이 더 낫겠지요. 하지만 이번에 실시된 ‘제5차 아동정책조정위원회’에서 보듯 정부는 아동학대 예산 증액을 요구하는 걸 마치 “지방에 SOC 예산 더 늘려달라”는 이익집단 보듯 합니다. 15년 동안 정부를 대신해 자부담까지 해가며 아동학대 문제를 맡아온 민간 단체들에게 고마워하며 “우리가 뭘 도울 건 없는지” 물어봐야 하는 게 정상 아닐까요.

아동보호전문기관에서 근무한 적 있는 A씨는 저에게 “다시는 그곳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 인간 존재에 대한 경멸과 삶에 대한 회의로 우울감이 들 때가 너무 많았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B씨는 “학대 부모들의 끔찍한 사례를 너무 많이 봐서, 결혼하면 절대 아기를 낳지 않기로 결심했다”며 트라우마에 시달린 경험을 털어놓았습니다.

올해도 정부는 357조원의 예산을 씁니다. 과연 우리나라는 아동학대를 막기 위해 이중 십만분의 1이라도 쓸 수 없는 후진국인가요. 납세자인 저에게 예산의 우선순위를 배정할 권리가 주어진다면 저는 아동을 위한 예산을 제1순위로 삼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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