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토)

오갈 데 없이 차별받던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 여기선 행복한 지구촌 어린이

[서울 구로구 지구촌어린이마을] 정부 보육비 지원 못 받는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 양육 부담에 빈곤 되풀이
외국인 노동자 협동조합이 매달 7만원씩 모아 운영
중국 동포 자녀 등 60명 마음 다독이고 학습 도와

한자(漢字) 간판이 즐비한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 거리. 한 골목으로 들어서자 허름한 건물들 사이로 알록달록한 3층 주택 하나가 도드라졌다. 이곳은 작년 3월 문을 연 ‘지구촌어린이마을’. 외국인 노동자 자녀를 위한 아동 보육시설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가팔랐다. ‘소망반’이라고 쓰인 방안에는 아이들 10여명이 둥글게 앉아 있었다.

지구촌어린이마을의 영어교사 안젤라씨가 소망반(5~6세) 아이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쳐 주고 있다.
지구촌어린이마을의 영어교사 안젤라씨가 소망반(5~6세) 아이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쳐 주고 있다.

“금성이 다 썼어요? 어디 보자.”

안젤라(39·스리랑카)씨가 반쯤 엎드린 아이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아이의 공책에는 알파벳이 삐뚤빼뚤하게 들어차 있었다. 영어 교사를 맡고 있는 안젤라씨는 “제대로 보육을 받지 못해 한국 아이들에 비하면 모든 게 많이 느린 편이지만 재밌어하고 잘 따라 한다”고 했다. 3~4세 아동들이 모여 있는 아래층은 시끌벅적했다. 전임교사 한미애(48·중국 동포)씨는 “하루 중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간식 시간”이라고 했다. 지구촌어린이마을에 있는 아이들은 모두 60여명. 대부분 중국 동포 자녀들이고, 몽골·스리랑카·콩고 가정의 자녀들도 있다. 이선희 지구촌어린이마을 원장은 “아직 미인가 시설이기 때문에 ‘어린이집’이라고 부를 순 없지만, 오갈 데 없는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에게 기본적인 보육과 교육을 제공한다”고 했다.

◇외국인 노동자 자녀들… 보육의 사각지대

국내에 거주하는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는 대략 1만5000~2만명. 외국인 노동자가 국내에서 자녀를 키우는 것은 녹록지 않다. 이선희 원장은 “남성들은 거의 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여성들은 파출부나 간병인 등을 주로 하는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맞벌이라 아이들 돌보는 것이 여의치 않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이어 “다문화 가정이라면 보육비를 전액 지원받을 수 있지만 출생 등록이 되지 않은 이주 배경 아이들의 경우, 부모와 똑같은 신분을 갖게 돼 어떤 지원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6세·3세 아들을 둔 최매화(34·중국 동포)씨는 “큰아이를 한국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50만원이 넘는 원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고 했다. 최씨는 식당 보조일을 하며 월 80만원 정도를 번다.

‘지구촌사랑나눔’이 그들을 독려해 어린이마을을 설립한 것도 그래서다. “기존에 우리 단체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부 인가 시설로 하다 보니 (정부 정책상) 다문화 가정의 자녀만 보육비 지원을 받을 수 있었어요. 29명 중 14명에 이르는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들에게는 아무런 혜택도 없었죠. 아이들 양육 때문에 빈곤이 되풀이돼요. 이 아이들을 보육하기 위해 마련된 곳이 바로 어린이마을입니다.”(김해성 지구촌사랑나눔 대표)

어린이마을에선 수혜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같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스스로 출자해 만든 협동조합(지구촌협동조합)이 운영 주체이기 때문. 매달 7만원씩 내는 조합비도 자체적으로 결정한 것이다. 교사이자 7세 난 아들을 이곳에 보내는 학부모인 안젤라씨는 “보육비에 대한 부담도 훨씬 덜하고, 힘들게 일하는 외국인들이 모여 의지한다는 점도 좋다”고 말했다. 아직은 운영비가 모자라 지구촌사랑나눔을 통한 후원에 의존하고 있다.

미상_사진_협동조합_지구촌어린이마을_2014

◇”얼굴에 침 뱉던 아이”… 인성 어루만지는 데 주력해

“아이들 3명을 배웅하는데, 갑자기 돌을 들어 주차돼 있던 차에 물결 무늬를 새기면서 가더라고요. 안에 차 주인이 타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네 살짜리 아이 엉덩이를 토닥였는데, 내 얼굴에 침을 뱉었던 일도 있었어요. 욕도 많이 하고, 굉장히 거칠기도 했죠. 기본적인 가정교육이 전혀 안 돼 있어 ‘옳고 그름’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던 거예요. 마음도 삐뚤어져 있었고요. 처음 1년 동안 기초적인 인성을 어루만지는 데 주력했어요.”

이선희 원장의 말이다. 어린이마을은 오갈 데 없었던 아이들의 안식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최매화씨는 “한국 어린이집에 있을 때 다른 원생들을 자주 때린다는 교사들의 전화가 자주 왔는데, 어린이마을에 다니면서는 말도 잘 듣고 성격도 온순해진 것 같다”고 했다. 어린이마을엔 전임교사, 보조교사, 자원봉사 등 7~8명이 활동한다. 이선희 원장은 “한국 교사들은 경력이나 임금이 안 돼 오지 않는다”며 “전문적인 교육이라기보단 마음으로 돌본다는 마음으로 하고, 자원봉사자들도 늘고 있다”고 했다. 한미애씨는 “중국에서 3년 정도 어린이집 교사로 일했던 경력을 활용하고 있다”며 “학부모들 역시 같은 문화권에서 살았던 동질감이 있어서인지 서로 이해하고 믿는 마음이 큰 것 같다”고 했다.

어린이마을은 설립 이후 소문만으로 정원을 채웠다. 이 원장은 “지금도 ‘우리 애 좀 맡아 달라’는 어머니나 할머니들을 많이 만나는데, 교사와 장소의 한계가 있어 대기자만 10여명에 이른다”고 했다. 김해성 지구촌사랑나눔 대표는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외국인 노동자의 자녀나 이주 배경을 지닌 아동도 보육과 교육에 대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와 법률을 바꿔주는 일”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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