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월)

“아이들은 특별한 선물… 믿고 기다려주면 비로소 가족이 되죠”

가슴으로 얻은 사랑, 입양
자신의 자녀 있음에도입양 통해 새 가족 맞아
공개입양 매년 느는 등 국내 입양문화 달라져
신뢰 바탕으로 가족 되는하나의 방법으로 부상
입양 경험 있는 가정직접 강연과 상담 나서공개입양 권유하기도

국내 입양문화가 달라지고 있다. ‘불임부부의 마지막 선택’은 옛말이다. 자녀가 있음에도 입양을 통해 새로운 가정을 꾸리는 추세다. 홍성보 서울아동복지센터 입양담당 주무관은 “예전에는 어색했던 다문화 가정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것처럼, 입양가족 역시 새로운 형태의 가족으로 보편화하는 단계”라고 했다. 공개입양의 확산이 변화의 징후다. 1970년대까지 국내에서 이뤄진 입양의 대부분은 비밀입양이었다. 입양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하지만 공개입양의 비중이 해마다 늘고 있다. 1986년 전체 국내입양 중 공개입양 비율은 15.5%에 불과했으나 2005년엔 40%를 돌파했고 지난해에는 절반에 육박한다(홀트아동복지회). 입양에 대한 인식이 개선됐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 8월 5일 개정된 입양특례법에 따라 법원허가제 등으로 비밀입양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면서 공개입양 은 더 늘어날 전망이다. 홍 주무관은 “선보고 결혼해 가정이 꾸려지는 것처럼, 입양도 신뢰를 바탕으로 가족이 되는 방법의 하나”라고 했다. 편집자 주


2011년 한국입양홍보회가 진행한 입양 홍보릴레이 사진전 'Say I love you' 작품 중 부산 지역 입양가족의 모습. /한국입양홍보회 제공
2011년 한국입양홍보회가 진행한 입양 홍보릴레이 사진전 ‘Say I love you’ 작품 중 부산 지역 입양가족의 모습. /한국입양홍보회 제공

◇다운증후군 두 남매 입양한 김기철·김정생 부부

한국선진학교 교장실 문이 열리자, 은조(13)군과 금조(7)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들~”이라는 김기철(55)씨의 외침에 은조가 ‘말춤’을 춘다. 빨간 안경에 남색 코트로 멋을 낸 금조는 “엄마”를 부르며 쪼르르 달려든다. 목소리가 어눌하다. 남매는 다운증후군 환아들이다. 은조가 정신지체장애1급, 금조가 2급이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은조가 엉거주춤 일어나더니, 방귀를 뀐다.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여러 번 계속된다. 어머니 김정생(55)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어머~, 쟤 좀 봐. 창피해~”를 연발한다.

김씨 부부는 자식만 넷이다. 김동조(28)군과 김한빛(27)양은 직접 낳은 자식이고, 은조와 금조는 입양을 통해 새로 가족이 됐다. 지난 1999년, 부부는 생후 2개월 된 은조를 새 가족으로 맞았다. 아이를 입양하기까지 무려 3년이 걸렸다. 김정생씨는 “다운증후군 신생아라는 조건이 까다롭고, 기관에서도 ‘왜 이런 아이를 입양하고자 신청했는지’상담을 여러 차례 거쳐야 했다”고 말했다. 입양 당시 은조의 건강 상태는 매우 나빴다. 두 가지 이상의 장애가 함께 나타나는 ‘복합장애’징후가 나타나기도 했다. 말문도 닫혀 있었다. 돌이 됐을 무렵, 집에 방문한 이웃이 “저 아이는 (살아남기) 힘들겠다”고 말했을 정도다. 하지만 부부는 편하게 생각했다.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첫째 아들 김동조(28)군도 다운증후군이다. “이런 장애를 가진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호흡이 약하고 뭐든지 늦어요. 첫아이(동조)를 키울 때, 다른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는데 제대로 앉지도 못하는 것을 보며 겁이 나기도 했지만, 부모가 여유를 가지고 기다려줘야 아이도 편안함을 느낀다는 것을 알았어요.”(김정생씨)

부부는 아이 영양 상태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두 살이 되기 전부터 인지와 언어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인지력이 떨어지는 아이를 위해 같은 말과 행동을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반복하는 것이 일상이었지만, 부부는 느긋하게 아이가 스스로 따라올 수 있도록 했다. 은조는 현재 학교에서 운동부(탁구부)를 할 정도로 건강하다. 말도 제법 잘한다.

2005년에는 금조가 가족으로 합류했다. 입양기관에 서류를 떼러 들렀다가 우연히 만난 아이다. 김기철씨는 “계획했던 것은 아닌데, 아이가 가슴에 와서 꽂히더라”며 “당시에는 내가 반대했고, 오히려 아내와 딸이 적극적으로 추진했다”고 했다.

장애아를 한 명 키우는 것도 모자라 두 명의 장애아를 입양하기로 한 이유는 뭘까. 김기철씨는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 좌절도 많았지만, 어느 순간 아이를 ‘특별한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면서 “입양을 통해 그런 가치 있는 경험을 잇고 싶었다”고 말했다. 물론 “정신 나간 짓을 한다”며 주변의 반대도 심했다. 특히 장애아 오빠를 둔 둘째 딸 한빛양은 은조를 입양할 때 “부담스럽다”며 반대, 승낙을 받기까지 2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이제 두 아이는 가족 일상의 중심이 됐다. 집도, 일하는 곳도 아이들 학교에서 5분 거리다. 행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바로 달려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두 명의 동생 덕분인지 한빛양은 전공을 숙녀복 패션에서 아동복 패션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어머니 김정생씨는 지금도 학교를 마친 아이들을 데리고 일주일에 세 번씩 언어·미술·인지치료를 받으러 다닌다. 김기철씨는 “대단하다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아이들이 가족에게 선사하는 행복이 훨씬 더 크다”고 했다.

◇끊임없는 공부 통해 건강한 입양가족 만든 김무련씨

미상_사진_입양_입양아_2012“엄마랑 아빠도 처음에는 남남이었어. 서로 만나서 가족이 된 거야. 네가 우리가 가족이 된 것도 그런 방법인 거란다.”

김무련(48)씨가 아들 현수(6)에게 자주 해주는 말이다. 김씨는 지난 2007년, 돌이 갓 지난 현수를 입양했다. 김씨는 처음 입양을 고민했을 때만 해도 ‘비밀입양’을 하려고 했다. 공개하고 나서 아이가 받을 충격이 클 것이라는 걱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입양에 대해 공부하면서 “두려움을 이길 수 있었다”고 한다. 김씨는 “아이를 믿고 말해주면, 오히려 아이가 상처를 극복하기 쉽다는 것을 알았다”며 “청소년이 사춘기를 거치는 것처럼, 입양된 아이들도 한 번씩 거치는 과정에 불과하다”고 한다. 김씨의 입양 공부는 지난 2005년, 미국의 입양가족을 돌아보는 현장학습부터 시작됐다. 미국 투어는 김씨뿐 아니라, 아내와 딸이 입양에 대한 용기를 얻는 계기가 됐다. 관련 도서를 찾아 읽거나, 세미나에 참석하는 일도 잦았다. 입양가족끼리 모이는 자리도 좋은 공부가 됐다. 김씨는 “아이들에게 말보다 중요한 건 입양된 아이들끼리 모이는 것”이라며 “그런 자리에서 서로 어울리는 것을 통해 아이들은 입양을 자연스럽게 여기게 된다”고 했다. 거주지인 과천 지역 입양가족끼리 주기적으로 왕래를 하거나, 여름·가을에 전국의 입양가족이 모이는 캠프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런 학습 과정은 아이를 양육하는 데는 물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계기도 됐다. 김씨는 요즘 입양에 대해 고민하는 직원들에게 카운슬링을 하거나, 직접 강연에 나서는 경우도 많다. 김씨는 “강연이 끝나면 많은 사람이 상담 신청을 하는데 주로 (입양을) 결심하는 것을 가장 어려워한다”며 “상담을 통해 입양을 결심하고, 비밀로 하고 싶었던 사람들이 공개입양으로 마음을 바꾸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모든 준비는 현수를 위해서다. 김무련씨는 현수를 ‘엄청난 축복’이라고 표현한다. 김씨는 “나는 돈 벌고, 아내는 밥하고, 아이는 공부하고. 어느 순간 가족에게 ‘기능’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그런데 우리 품에 ‘돌봐야 할 대상’이 생기자, 세 명의 가족이 하나가 됐다”고 했다. 그는 이어 “지금 우리 가족에게 현수는, ‘만약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소중한 존재”라고 했다.

“입양 후 가장 힘든 점은 무엇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김무련씨는 미소를 띤 채 말했다. “아이가 입양되고 나면, 입양아라는 사실은 아무 의미가 없어집니다. 내 아이니까요. 만약 힘든 게 있다면 그건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점이에요. 입양아를 키우면서가 아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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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호 202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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