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토)

전공·경험 살려… 나눔으로 새로운 인생 찾은 사람들

[나눔 실천하는 실버세대] 실버넷 뉴스- 55세 이상 노년층 주축… 실버세대 인터넷 언론사
‘아름다운 가게’ 우명옥씨- 10년간 6000시간 봉사… 이웃 돕고자 자격증 취득
바라봄 사진관- 촬영 전 충분히 대화하고 장애인·소외 이웃 할인도

“보기 드문 색감인데요. 이 작품 디자인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노란색 코트를 곱게 차려입은 최진자(65)씨가 디자이너에게 마이크를 건네며 질문을 던졌다. 김금순(70)씨는 디자이너 가까이 카메라 삼각대를 세우고, 촬영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녹화된 영상을 확인하던 김씨가 “오케이” 사인을 내며 활짝 웃었다. 이들은 몸집만 한 카메라 장비를 번쩍 안아 들고 이들은 전시회 곳곳을 렌즈에 담아갔다.

지난 10월 16일, 문화역서울 284(구 서울역)에서 열린 전시, ‘인생사용법’을 취재하는 실버넷 뉴스 영상촬영팀의 모습이다. 실버넷뉴스는 만 55세 이상 노년층이 주축이 되어 2002년부터 10년 넘게 유지돼온 인터넷 언론사다. 현재 200명이 넘는 실버기자들이 실버들에게 노인복지 정책, 지역 이슈, 문화 행사 등 다양한 소식을 전하고 있다. 이들은 “우리가 취재한 영상뉴스는 최소 2만건에서 최대 4만건까지 조회 수가 올라갈 정도로 인기가 많다”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실버들을 위한 실버 기자단, ‘ 실버넷뉴스’영상팀이 취재를 마치고 포즈를 취했다.
실버들을 위한 실버 기자단, ‘ 실버넷뉴스’영상팀이 취재를 마치고 포즈를 취했다.

◇기자로서 당당하게 제2의 인생 찾은 실버넷뉴스팀
매주 월요일 업데이트하는 영상뉴스를 위해 이들은 일주일 내내 쉴 틈이 없다. 지역 신문, 지자체 자유게시판, 페이스북은 하루에도 몇번씩 체크한다. 실버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찾기 위해, 이들은 언제 어디서나 눈과 귀를 열어둔다. 실버넷뉴스 4년차 기자 정정자(70)씨는 “촬영, 편집, 자막, 내레이션, 스튜디오 녹음까지 실버기자들이 직접 하고 있다”면서 “장비도 실버들이 직접 구입하고, 무료봉사지만, 기사 작성은 물론 영상작업까지 많은 것을 배운다”고 전했다. 30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던 정씨는 은퇴 후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60세가 되던 2002년에는 한국문인협회 심사를 통과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글을 쓰면서도 활동적인 일을 하고 싶었던 정씨에게 실버넷뉴스 기자는 안성맞춤이었다. “제가 출간한 시집을 과연 몇 명의 사람들이 봤을까요. 제가 찍은 영상뉴스 조회 수가 만 건 넘게 올라갈 때마다, 기자라서 참 행복합니다.”

영상팀을 총괄하는 김금순씨는 30년간 외국에서 간호사로 일하다가, 한국에 와서 영상을 배웠다. 2004년 정보화진흥원 IT 봉사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촬영의 기초를 배웠고, 정보화진흥원의 도움으로 아리랑 미디어센터에서 전문성을 쌓았다. 영상을 배우자마자 성북구 영상공모전에서 장려상을 탔고, 2006년엔 드라마 ‘인터넷에서 만난 첫사랑’으로 정보화진흥원 공모전에서 2등을 했다. 각 지역 복지관, 정보화교육기관에서 진행되는 김씨의 영상 수업은 인기 강좌다. 김씨는 “최근 강남스타일을 패러디한 ‘실버스타일’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는데, 판도라 TV 조회 수가 4만 건을 넘었다”면서 “기자생활을 하니 유행과 트렌드에 밝아진다”고 말했다.

무언가 배우려는 열정과 관심은 이들의 몸과 마음을 더 젊게 만들었다. 실버넷뉴스 10년차 기자 오장열씨는 “노인대학에서 컴퓨터 강의를 듣기 시작하면서 인터넷 작업에 능해졌다”면서 “옥션 사이트에서 중고 물품을 경매해 더 좋은 카메라 장비로 계속 업그레이드 중이다”며 미소를 지었다. 5년차 기자 최진자씨는 “취재 나갈 때 영상팀과 함께 나가니 외롭지 않고, 누군가 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 굉장히 힘이 된다”고 했고, 영상팀 이종옥씨는 “무거운 카메라 장비를 들고 다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건강해졌다”며 다시 찾은 제2의 직업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10년 동안 6000시간 봉사한 우명옥 할머니.
10년 동안 6000시간 봉사한 우명옥 할머니.

◇10년간 6000시간 봉사한 74세 우명옥 할머니

아름다운가게 안국점에서 만난 우명옥(74)씨의 손은 따뜻했다. 가게를 방문하는 모든 손님에게 손을 잡으며 인사를 건네는 그녀는 아름다운가게 안국점의 ‘어머니’로 불린다. 2002년 아름다운가게 설립 때부터 지금까지 우씨는 단 하루도 봉사시간을 거른 적이 없다. 그렇게 10년간 그녀가 봉사한 시간이 무려 6000시간에 달한다. 일주일에 세 번 아름다운가게에서 봉사하는 우씨는 시간이 비는 요일엔 고아원이나 양로원을 찾아가 외로운 이들의 말벗이 돼주고 있다.

우씨의 나눔은 은퇴 전부터 계속 이어져 왔다. 35년간 고등학교 국어선생님으로 일하던 그녀는 어려운 이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추운 겨울날 길을 지나가는데, 구두닦이 학생이 찢어진 교과서를 손에 들고 열심히 읽는 모습을 봤어요. 반 학생들과 일일찻집을 열었어요. 수익금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에 기부하고, 그 학생에게 교과서를 선물했죠.”

월급의 일부는 항상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썼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트럭에 학용품을 잔뜩 싣고 고아원에 방문했다. 장애인복지관에 연탄을 배달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정년퇴임 후엔 더 많은 사람을 돕고 싶어, 현직에 있을 때부터 부지런히 준비했다. 유치원·초등학교·중고등학교 교사 자격증을 모두 땄고, 호스피스 자격증, 보건관리 자격증, 심리치료 자격증도 받았다. 우씨는 “은퇴 전에 내가 어떤 봉사를 하고 싶은지 고민해보고 자격증을 따면, 은퇴 후 뜻깊은 일로 나눌 수 있다”고 조언했다.

“봉사를 하면 할수록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는 걸 느낍니다. 나 자신이 누군가의 대화 상대가 되고,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 자체로 삶의 힘을 얻습니다. 작은 봉사부터 시작해보세요. 집에 혼자 있을 때보다 열 배는 더 웃게 된답니다.

장애인을 위한 사진관, ‘ 바라봄 사진관'의 나종민, 정운석씨.
장애인을 위한 사진관, ‘ 바라봄 사진관’의 나종민, 정운석씨.

◇장애인의 웃음을 찍는 ‘바라봄 사진관’

“가족사진을 한 번도 찍은 적이 없어요. 왠지 마음이 위축되고 불편해서 사진관에 갈 엄두가 나질 않아요.”

지난해 5월, 장애인시설복지관에서 열린 체육대회에 사진 봉사를 나간 나종민(50) 대표가 장애인 아동의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나 대표는 “장애인 가족이 마음 놓고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면서 “학원에서 전문적으로 배운 사진 기술을 좀 더 필요한 곳에 제대로 쓰고 싶었다”고 했다.

마이크로스트래티지, 한국하이페리온 지사장을 거치며 21년간 IT업계에서 일하던 나 대표가 은퇴를 결심한 이유는 조금 더 젊을 때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대기업 공장장으로 일하다 은퇴한 정운석(59)씨도 나 대표의 뜻에 선뜻 동참했다. 각자 1000만원씩 자금을 마련한 이들은 지난 1월,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에 ‘바라봄 사진관’을 열었다. 누구나 이곳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지만, 장애인이나 소외된 이웃에겐 30%를 할인해주고 있다.

두 사람은 한 가족의 촬영을 위해 최소 3시간을 할애한다. 사진을 찍기 전에 고객들과 충분히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이 편해지길 돕는다. 몸이 불편한 이들도 마음 놓고 카메라 앞에 설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 정씨는 “지금까지 방문한 고객들의 99%가 평생 사진관에 처음 온 분들이었다”면서 “가족이 찍는 첫 사진을 더 예쁘게 찍어주고 싶다”며 웃었다.

지난 5월엔 개인 및 단체로부터 소액 후원금을 모으는 소셜펀딩 ‘개미스폰서’를 통해 300만원을 후원받아 30가구의 가족사진을 찍어줬다. 나 대표는 그때 만난 한 모자(母子)의 사연을 소개했다. “86세 어머니가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는 60세 아들과 함께 왔어요. 노령연금과 기초생활수급비의 일부를 떼어 또 다른 장애 아동들에게 기부하고 계셨어요. 바라봄 사진관도 장애인뿐만 아니라 소외된 이웃 모두 편하게 놀러 와 사진 찍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가려고요.”

이들의 목표는 자립 가능한 수익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다. 나 대표는 “사진에 관심이 많은 실버세대들이 제2, 제3의 바라봄 사진관을 만들 수 있도록, 사진 기술뿐만 아니라 안정된 수익 모델을 개발해 전수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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