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월)

사회적경제, 새로운 전환을 이야기하다

[사회적경제 세계 석학 대담]

 

멈춘 경제성장·실업·워킹 푸어 등 사회적 위기서
새롭게 주목받는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캐나다 퀘벡주는 1990년대 초 경제 위기 당시 실업률이 14%에 달했다. ‘위기’에서 사회적경제가 시작됐고, 지금은 퀘벡주 전 인구(약 800만명)보다 협동조합 조합원 수(약 880만명)가 더 많다. 농수산물 소비자생협에서부터 의료생협, 대학의 학생협동조합이나 주택조합 등 사회적경제 조직이 7000곳이 넘는다.”(마거릿 멘델 칼폴라니정치경제연구소장)

사회적경제는 일자리 창출과 양극화 해소의 열쇠가 될 수 있을까. 지난 18일 문재인 대통령이 3차 일자리위원회 회의에서 “사회적경제는 우리 경제가 직면한 고용 없는 성장과 경제적 불평등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밝힌 후 사회 곳곳에서 사회적경제가 주목받고 있다.

이에 더나은미래는 20일 ‘제14차 칼폴라니 국제학회’를 찾은 2인의 석학을 만나 ‘사회적경제, 새로운 전환을 이야기하다’라는 주제로 대담을 진행했다. 캐리 폴라니 레빗 교수(캐나다 맥길대 명예교수)는 사회적경제의 이론적 기반을 만든 ‘칼 폴라니’의 딸이다. 책 ‘거대한 전환’을 집필한 헝가리계 오스트리아 경제학자 칼 폴라니(1886~1964)는 “시장경제를 탈피해 사람이 중심이 되고 관계를 회복하는 사회적경제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고 밝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크게 조명을 받았다. 마거릿 멘델 캐나다 콩고디아대 교수(칼폴라니정치경제연구소장)는 캐나다 퀘벡에서 사회적경제를 이끈 석학으로 퀘벡 정부 사회적경제 협의체인 ‘샹티에’ 이사이기도 하다. 캐나다 퀘벡은 스페인 몬드라곤, 이탈리아 볼로냐와 함께 세계 3대 사회적경제 모델로 꼽히는 곳이다. 대담은 민형배 전국 사회연대경제 지방정부협의회장(광주 광산구청장)의 진행으로 이뤄졌다.

마거릿 멘델(왼쪽) “중앙정부는 모든 사회적경제정책들을 일관성있게 추진해야 “, 캐리 폴라니 레빗(가운데) “오늘날 불평등의 구조화는과도한 시장 만능주의서 파생”, 민형배(오른쪽) “사회적경제 활성화 위해자치 분권 보장이 중요” ⓒ조현호 C영상미디어 기자

민형배=50년도 더 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폴라니 열풍이 부는 이유가 뭘까.

캐리 폴라니 레빗(이하 레빗)=위기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성장이 멈췄고, 불평등이 구조화됐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일자리가 줄어들고, 장시간 노동에도 빈곤한 워킹 푸어(working poor)가 증가하고 있다. 칼 폴라니는 시장경제 체계의 한계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아무런 규제가 없어도 시장이 알아서 수요와 공급을 조정한다는 ‘자기 조정 시장’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봤다. 2008년 금융 위기를 비롯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위기는 과도한 시장 만능주의가 낳은 것이다.

마거릿 멘델(이하 멘델)=사회적경제가 만능 해결책은 아니다. 다만, 이익만 좇는 게 아니라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인간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문제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캐나다 퀘벡주에선 많은 젊은이가 먹고사는 것을 넘어서서 ‘더 나은 삶’에 대한 기대감으로 사회적경제에 뛰어들고 있다. 2013년엔 의회 만장일치로 ‘사회적 경제 기본법’도 통과됐다. 기본법에 따라 퀘벡주의 모든 부처는 모든 정책에 사회적경제를 고려해야 한다. 정당과 이념을 뛰어넘은 정책으로 자리 잡았다.

민형배=지난 10년간 한국에서도 사회적경제가 양적 성장을 이뤘다. 그러나 전반적인 인식이나 풀뿌리 연대가 양적 성장에 비해 높진 않은 것 같다. 아직은 사회적경제와 일상의 경제활동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농협이나 수협, 축협, 새마을금고 같은 협동조합은 오래전부터 대규모로 존재했지만, 사회적경제 영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개인 간 연대나 자율성에 기반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정부가 통제하고 관리하는 형태였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시장의 사회 지배력이나 중앙집권화가 과도하게 높았던 것도 사회적경제 활성화를 지연하는 요소다.

ⓒ조현호 C영상미디어 기자

멘델=그럼에도 지난 10여 년간 사회적경제에서 한국이 이룬 성장은 놀랍다. 국가 주도가 아니라 지방자치단체와 도시에서 큰 역할을 했다. 사회적경제가 성장하고 일상에 들어오려면 정치적 지원은 필요하다. 국가 주도와는 차이가 있다. 올해 들어 새 정부가 청와대에 ‘사회적경제 수석 비서관’을 신설했다고 들었다. 하나의 신호라고 생각한다. 중앙정부에선 모든 층위에서 사회적경제가 제대로 추진되도록 정책 간 일관성을 추진해야 한다. 또 사회적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필요한 법령을 제·개정해 나가는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 사회적경제는 ‘좌우’ 이념을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

민형배=우리나라는 중앙집권화가 강력하고 지방정부의 권한이 제한적이라 지역에 특수한 사회적경제 정책을 시행할 때 어려움이 있다. 광산에는 ‘클린광산 협동조합’이 있는데, 청소 용역 업체 중 한 곳이 폐업하면서 그곳에서 일하던 청소 노동자 17명이 협동조합을 조직했다. 광산구청에서도 차량을 무상 임대하고, 원래 폐업한 업체가 담당했던 구역 청소를 맡겼다. 임금이 올랐고, 서비스 질도 좋아졌다. 그런데 협동조합에 준 용역을 계속 이어가는 게 쉽지 않다. 지자체가 용역을 수의계약하는 것을 제한하는 국가 법률 때문이다.

멘델=미국 오하이오주의 클리블랜드에선 시민들이 도시를 바꿨다. 클리블랜드는 1950년대 제조업 황금기가 지나고 경제 동력이 사라지자 ‘유령 도시’가 됐다. 미국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도시였다. 이 지역에 지역 재단인 ‘클리블랜드재단’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몇몇 활동가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드는 운동을 진행했다. 감옥에서 출소한 이들, 도시 변두리에 살던 이들이 모여서 요양병원 세탁, 태양열 패널 설치 등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양한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재단은 정부를 비롯해 다양한 기관과 ‘공공 조달’ 협약을 맺고, 대학이나 병원 등과 일할 수 있도록 시장을 만들어줬다. 수급자였거나 일자리를 잃었던 이들이 조합원이 되어 돈도 벌고, 서비스의 질도 좋아졌다. 지금은 이 같은 협동조합 모델이 미 전역으로 확산됐다. 공공 조달 시장에 진입할 길을 열어주는 건 사회적경제 활성화에 매우 중요하다.

민형배=광주 광산을 비롯해 지역에선 인구 고령화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 광산에서는 폐지 줍는 노인 100여명이 모여 ‘마중물’이라는 협동조합을 만들었다. 20여명의 노인이 직원 조합원이다. 그 밖에 목수공방 협동조합, 동네 경력 단절 여성들이 모여 반찬을 공급하는 협동조합, 아이들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돌봄 서비스를 제공하는 협동조합 등 다양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사회적경제를 활성화하기 위해선 자치 분권을 보장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멘델=자치 분권은 중요한 이슈다. 퀘벡주에선 몇달 전 퀘벡주 내 도시가 더 큰 자치권을 갖도록 보장하는 법안을 통과했다. 중요한 건 자치권과 함께 일정 정도의 ‘자원’도 보장했다는 거다. 당장은 공공 조달 조례를 개정하거나 사회적경제 기본법을 통과시키는 해결책부터 시작할 수 있다고 본다. 지역에선 사회적경제 활성화에 필요한 자치권과 자원을 줄 것을 중앙정부에 요구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사회적경제는 지역 풀뿌리 기반이어야 하고,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이식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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