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4일(금)

종가의 정신적·물질적 가치 드러낸 ‘문장’… 브랜드 가치 창출할 것

종가(宗家)문화명품화 프로젝트_ 서울대 김경선 교수

요즘 ‘디자인’이라는 단어는 유명세를 치르고 있다. 하지만 디자인을 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마음에 다가오도록 답을 주는 사람은 드물다. 서울대 디자인학부 김경선(40) 교수와의 만남은 좋은 자극이 됐다. 김경선 교수는 경상북도의 ‘종가(宗家) 문화 명품화 프로젝트’에 참여해 500년 종가들의 문장을 디자인해주고 있다.

“디자인은 한마디로 본질이 무엇인지 알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음식의 포장은 이 음식이 어떤 맛이 날지, 어떤 향이 날지, 이 음식에 담겨 있는 사람의 노력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통로 같은 것입니다.” 종가의 문장을 제작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종가들은 그 가문이 가지고 있던 소중한 물질적인 가치와 정신적인 가치들을 여전히 지키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외부에 어떻게 표현되고 전달될지에 대해서도 이제는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입니다.”

김경선 교수가 디자인한 '쌀과 밀'의 소품들이다. 김 교수는 한글 자체의 형태를 응용했다.
김경선 교수가 디자인한 ‘쌀과 밀’의 소품들이다. 김 교수는 한글 자체의 형태를 응용했다.

없는 문장을 굳이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질문에 직면해서도 김경선 교수의 뜻은 흔들리지 않았다. “종가에서 만든 된장이 대량 생산된 제품처럼 플라스틱 용기에 판매된다면 제대로 된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보기 힘들 겁니다. 종가의 가치를 그 가치만큼 드러나도록 보여줄 수 있는 방법들을 고민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김경선 교수는 종가의 문장이 그런 역할을 하는 시작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종가의 문장이 종가에서 만든 제품이나 서비스와 결합되어 종가다운 브랜드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경선 교수가 종가의 문장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영국 유학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것은 거리 곳곳에서 발견되는 오래된 간판들이었다. “왠지 간판에 관심이 갔어요. 간판이라는 건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그 지역과 시대도 보여주고 있죠. 영국에서 한 교수님의 연구실을 갔는데 간판의 재료별로 글자가 다 있었어요. 이런 것들도 문화의 유산이라고 생각하신 거죠.” 결국 영국에서 ‘거리 표지로 도시 읽기’란 논문을 썼다. 그는 간판을 관찰하며 ‘글자’가 가지는 조형적이고 의미적인 느낌을 조금 더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디자인에 대해 고민했고, 사회의 현상과 지역의 상황을 표지를 통해 표현하는 방법론도 고민했다. 이런 경험은 종가의 문장을 디자인하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연구팀이 고민했던 것은 종가를 종가답게 만드는 문장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있었다. 그래서 종가 하나하나를 방문해 종가의 이야기를 듣는 것부터 시작했다. “매방산에서 날아오른 매가 앉은 터에 집을 지었다”거나 “임금에게 하사받은 옥피리를 시집가는 딸을 통해 전승케 했다”는 이야기들을 모두 종가의 문장 디자인 속에 녹여냈다. “처음에 종가에 가면 우리 집엔 국보급 보물이 없다며 말씀을 피하십니다. 하지만 하나 둘 이야기를 듣다 보면 놓치고 지나가기엔 아까운 것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이렇게 연구팀이 만든 문장에는 서로 다른 종가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때로는 집을 상징하는 나무가, 때로는 집에 있는 오래된 벼루가 종가들의 문장으로 재탄생했다.

12개 종가의 이야기를 듣고 종가의 모습을 하나하나 지켜본 김경선 교수에게 종가를 통해 발견한 한국적 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김경선 교수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아직 모르겠습니다. 너무 많이 훼손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폐허로 변한 종가도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관리와 보호가 더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김 교수는 “종가를 지키는 사람들의 마음은 그 어떤 것보다 고왔다”며 이런 마음들이 이어질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고민을 밝히기도 했다. ‘종가 지키기’에 지자체, 학계, 중앙정부, 기업, 종가 모두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김경선 교수를 매료시키는 것은 ‘쌀과 밀’이라는 식당이다. ‘쌀과 밀’은 SK행복나눔재단의 청소년 자립 프로그램 중 하나인 해피쿠킹스쿨을 수료한 청소년들이 일하고 있는 식당이다. 김경선 교수는 음식에 대한 아이디어부터 조리에 이르기까지 최선을 다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 재료와 우리 음식을 소통하려는 진심을 엿봤다. 결국 ‘쌀과 밀’의 CI와 가게의 소품들에 들어가는 그래픽을 모두 직접 디자인해줬다. “종가의 사람들에게서나 이제 막 음식에 대해 고민하는 아이들에게서나 우리 것의 본질을 소통하겠다는 마음에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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