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일)

[비영리활동가의 일과 삶의 균형] 공익활동은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 ④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과 삶을 꾸려가는 것 그리고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왜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가… 우리는 현재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는 가족의 붕괴와 지역사회의 분화, 그리고 하나의 올바른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어떻게 유지해나갈지 걱정하고 있다.”

– 로버트 라이시의 『부유한 노예』 중

책_도서_로버트라이시_부유한노예_표지_2016일은 행복한 삶에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마틴 셀리그만은 삶의 위대한 세 영역을 일, 사랑, 놀이라고 한다. 이 셋을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실제 이 셋으로 삶을 채우며 여기에서 살아가는 의미를 찾는다는 이야기다. 그 중 ‘일’영역은 하루 10시간 이상을 일터에서 보내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과 삶의 균형에 대한 이슈는 ‘일’의 과잉현상으로 인한 부작용을 지적하면서 상대적으로 등한시되고 있는 가정과 자아성장, 여가에 대한 회복을 통해 균형점을 맞추려는 논의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일과 삶이 균형을 이루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삶의 영역 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일’ 자체의 의미와 본질을 제대로 아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드라마 미생의 김대리가 “일이 바로 나”라고 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일을 통해 삶의 의미와 정체성을 찾기 때문이다.

영리와 비영리를 떠나 어느 조직에서든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다. 신경생리학자 아힘 바우어는 “우리는 일하는 동물(Animal laborans)인가, 일하는 인간(Homo laborans)인가”라고 묻는다. 인간이 의미를 상실한 채 일하고, 낮은 임금을 받거나 영혼 없는 기계가 되어가는 현 시대의 노동을 비판한다. 더욱이 갈수록 일자리는 줄고 실업이 극심해져가는 무업사회에서 노동은 그 자체로 특권이 되어버려 노동의 적절한 대가나 환경을 따지는 목소리는 배부른 투정으로 치부되어 버린다. 어느 순간 노동이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노동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 

독일의 현대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일과 노동을 구별한다. 이 두 단어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에서도 어원을 달리하고 있는데 ‘노동’은 생존과 욕망 충족을 위해 행하는 육체적 활동이다. 반면 ‘일’은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거기서 재미와 일정한 명예를 바라며 수행하는 자발적 행위다. 고대희랍 도시국가에서 자유시민의 생활영역은 공적인 부분과 사적인 부분으로 엄격하게 양분되어 있었으며, 끊임없이 반복해야 하는 노동은 고대희랍에서 노예 몫으로 돌리고 자유시민은 공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소비가 증대되고 시장기능이 발달되면서 제3의 영역인 ‘사회’가 등장하였고, 사회영역이 확장됨에 따라 공적영역에 투입될 인간의 자유가 동물적 필요 충족에 눌리게 되어 높은 이상을 추구하는 의미있는 인간 활동인 ‘일’이 쇠퇴하게 되었다고 본다. 즉, 근대 자본주의의 발달이 인간을 노동에만 몰두하도록 강제해 동물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었다고 지적한다.

비영리활동가들은 자신의 일을 일이나 노동이라 부르지 않고 ‘활동’이라 부른다. 활동은 아렌트의 관점에서 의미 있는 인간활동인 ‘일’과 바우어가 주장하는 ‘인간을 위한 노동’의 의미에 가깝다. 더 정확히는 아렌트가 인간이 활력이 있는 삶을 추구하기 위한 조건으로 제시한 노동, 일, 활동 중 ‘활동’과 일치한다. 노동은 생계유지를 위해 반드시 해야만 하는 수고이고, 일은 좀 더 즐겁고 생산적인 자발적 활동이며, 활동은 공동체와 공익을 위해 소통하는 것을 말한다. 활동가들은 단체에서의 활동을 통해 생계유지를 위한 수고와 생산적인 자발적 활동, 공익을 위한 소통을 동시에 수행한다. 지구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직업)이 아닐 수 없다. 비영리활동가의 일은 활력이 있는 삶을 위한 완벽한 조건을 갖추고 있으나 이를 수긍하는 활동가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비영리활동가들은 정부와 기업이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이나 조직의 이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지향점은 같으나 세상에 존재하는 비영리단체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2012년 한국민간단체총람 조사에 의하면 국내 비영리단체는 12,657개가 파악되고 있으나, 실제 2만5천에서 3만개 정도까지 추정되고 있다. 활동가들은 단체에 소속되어 환경, 인권, 평화/통일, 여성, 권력감시, 정치/경제, 교육/연구, 문화/체육, 복지, 청년/아동, 소비자권리, 도시/가정, 노동/빈민, 외국인, 모금, 자원봉사, 국제연대, 대안사회, 온라인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하고 있다. 참여연대, 경실련, 월드비전, 기아대책본부, 굿네이버스 등 규모가 큰 비영리단체들은 사업부와 사업을 지원하는 운영부가 구분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10명 내외의 소규모 단체들은 사업과 운영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 사업을 기획하는 것부터 사업비 조달, 실행, 평가, 장부정리 및 회계처리, 보고 등 단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은 활동가의 몫이다.

활동가가 가장 힘들어 하는 일은 행사다. 활동가들 사이에서 활동가의 일은 행사에서 시작해서 행사로 끝난다는 말이 회자된다. 비영리단체들은 참여와 소통을 중시하기 때문에 기업이나 공공조직보다 회의와 행사가 잦다. 의사결정을 위한 총회, 이사회, 임원회의 부터 모금을 위한 바자회, 후원의 밤, 자원봉사자 모임 등 수많은 행사를 치러내야 한다. 초청장 리스트를 작성하고, 초청장을 만들어 일일이 봉투에 집어넣고 풀을 붙여 발송하고, 전화를 돌려 참석여부를 확인해야 하고, 행사장 배치, 도시락 주문, 기념품, 유명인 초청 등등 밤을 새워 일을 해도 해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행사를 몇 번 치르다보면 활동가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심한 소진현상을 보이게 되고, 결국 활동을 그만두게 되는 경우가 많다.

활동가들은 평화, 인권, 자유, 정의와 같은 궁극적 가치(terminal value)를 중시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강하고, 불규칙하고 적은 소득도 감내할 수 있으며, 자신의 일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일에 있어 돈보다는 즐거움과 보람을 추구하기에 이 길을 선택한 사람들이 틀림없다. 하지만 활동가들 역시 우주의 어느 별에서 날아 온 안 먹고도 살 수 있는 고도의 지적 생명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똑같은 인간이다. 열악한 조직 여건 속에서 저임금을 받고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다 보면 현대를 사는 다른 직장인들처럼 일이 점차 고통이 되어갈 수밖에 없다.

본문과 직접적 관련 없음. /pixabay

활동가들의 상황에 대해 혹자는 자신이 좋아서 선택한 일이니 참던가, 그게 싫으면 그만두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짐 콜린스는 “우리에게 위대한 기업만 있다면 풍요로운 사회를 건설하지는 못할 것이다. 경제성장이나 경제력은 위대한 국가를 건설하는 수단일 뿐 그것만으로 위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위대한 사회를 건설할 위대한 비영리기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누리는 많은 권리와 자유들이 누군가의 피와 땀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산다. 국가와 시장이 해결할 수 없는 사회문제들을 찾아 해결하고, 잘못된 정책을 바로잡기 위해서 때로는 투쟁하고, 손길이 닿지 않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한다. 위대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는 그 누군가가 바로 활동가들이다. 활동가들이 가슴 설레는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활동할 수 있을 때 공동체는 풍요로운 사회를 향유할 수 있다.

“소외받고 힘없는 사람들과 뭇 생명들의 아픔에 민감한 사람들이 활동가다. 민감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를 보다 아름답게 만들어 왔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윤기돈(녹색연합 활동가)

현대를 사는 어느 누구도 생계유지를 위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높은 이상을 추구하며 의미 있는 활동만 하고 살 수도 없다. 활동가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활동가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왜 이 일을 하는 가”에 대한 성찰이다. 활동의 의미와 가치를 끊임없이 캐물으며 자신이 가야할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면 노동과 일 사이 적절한 균형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답하는 길 위에서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마음껏 누릴 때 진정 의미 있고 충만한 삶을 살 수 있다. 아직도 활동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활동이 삶 자체이고 놀이이고 도전인 활동가들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복 받은 거다.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열망 넘치는 조직과 사람들을 지원하는 것”이 삶의 미션이다. CSR, CSV, 섹터 간 파트너십, 민관협력(거버넌스), 리더십, 전략경영, 성과평가, 소셜임팩트, 일가정양립 등의 주제에 관심을 가지고 영리와 비영리를 넘나들며 강의, 교육, 컨설팅, 연구 등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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