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금)

“휠체어는 나의 날개” 말총머리 무용가 날다

휠체어 무용가 김용우

“넘으려던 장애 인정하고 나니 그제야 사회 보이기 시작해”
후회 없이 살기 위해 선택한 ‘춤’ 아시아 챔피언·세계선수권 등
장애·비장애 무용수 함께하는 ‘빛소리 친구들’ 창단하기도

 

빛소리 친구들_사진_김용우 단장_2016
2009년 11월,‘빛소리 친구들’의 첫 정기 공연모습. 김용우 단장은 “댄스스포츠를 넘어 무용이라는 새로운 영역을 열었다는 기쁨이 컸다”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 꼽았다. / 김용우 단장

“긴장을 늦추면 안 돼요. 에너지가 계속 연결되어야 합니다. 양팔을 길게 뻗어주세요. 손가락을 모으고 사선으로 펼치세요. 곡선 에너지가 남아 있을 때 선이 아름다워집니다.”

‘말총머리’ 무용수는 휠체어에 앉은 채 날렵하면서도 섬세한 몸짓을 선보였다. 김용우(45) ‘빛소리 친구들’ 단장이다. 올해로 15년 차. 2005년 홍콩 아시아 휠체어 댄스스포츠 대회 우승을 시작으로 4년 연속 아시아 챔피언을 거머쥐고, 2008 벨라루스 국제장애인올림픽위원회(IPC) 세계선수권대회 4위를 기록한 선수다. 무용가로까지 영역을 넓혀, 지난해 말에는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상 대상을 받았다. 무엇이 그를 지치지 않게 하는 것일까. 지난 7일 경기 고양시 자택에서 휠체어를 자신의 ‘날개’라 표현하는 남자, 김용우를 만났다.

◇사업가를 꿈꾸던 엉뚱하고 쾌활한 청년

“어린 시절요? 정말 평범한 아이였어요. 조금 특별한 게 있다면 우연히 명상에 대해서 알게 되면서 ‘신선’이 되고 싶었죠(웃음).”

빛소리 친구들_사진_김용우 단장_2016
무대 위에서의 김용우 단장. 김 단장은 “장애인이 무대에 올라서 감동적인 것이 아니라 작품성과 예술성을 통해 울림을 주는 무용단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 김용우 단장

 ‘신선’을 꿈꾸던 소년은 엉뚱한 행동을 많이 한 탓에 고등학교 3년 내내 ‘사이코’란 별명이 따라붙었다. 대학에서는 과 대표와 응원단을 도맡아 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유학 길에 올랐다. “아버지가 요식업을 크게 하셨어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죠. 영어를 배운 다음 중국에 가서 사업을 하려고 했어요.” 1997년 7월, 사업가의 꿈을 품은 26세 청년은 캐나다로 향했다. 캐나다에서도 영어만 배우기는 아쉬워 영어로 연극을 만들고 무대에 올리는 어학 연수 과정에 참여했다. ‘영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영화를 각색해 올린 연극은 그야말로 ‘대박’이 났다.

“공연을 마친 다음 날 로키 산맥으로 여행을 떠났어요. 불과 몇 시간 만에 사고가 났죠.”

쾌청하던 하늘이 급격히 어두워지더니 눈과 비가 퍼부었다. 초행길을 운전하던 청년 7명은 그대로 빗길에 미끄러졌다. 도로를 벗어난 차는 언덕을 굴렀다. 척수의70% 손상. 깨어난 그에게 의사는 ‘하반신 불구’ 판정을 내렸다.

◇”다시 걷는 게 아닌 후회 없이 사는 것, 생각을 바꾸자 세상이 달라졌다”

빛소리 친구들_사진_김용우 단장_2016
지난 8일 서초구립 한우리정보문화센터 3층에서 만난 김용우 단장의 모습. 단원 한 명 한 명을 세심하게 지도한다. / 오민아 더나은미래 기자

“장애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죠. 캐나다에서는 모든 곳에 편의 시설이 잘 갖춰져 있었고 휠체어를 탄다고 다르게 보는 사람도 없었어요. 사고가 난 이듬해 3월, 한국으로 돌아오는 공항에서 비로소 깨달았죠. ‘아, 이게 장애구나’.”

공항에서부터 다른 사람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휠체어가 갈 수 없는 곳이 태반이었다. 그중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사람들의 시선이었다.

“‘몸도 불편한데 집에 있지 왜 나오느냐’는 말부터 동정의 시선까지…. 시야에서 제가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는 분들도 계셨어요. 다시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고 치료에 매달리게 됐죠.”

골반까지 오는 보조기를 차고 양쪽에 목발을 짚고 매일매일을 걷고 또 걸었다. 앞뒤로 50대씩 침을 하루 100대 맞기도 하고, 살을 태우다시피 하는 커다란 뜸도 여러 번 떴다. 부모님은 묵묵히 아들을 지지했다. 그렇게 긴 싸움을 벌이는 동안, 문득 존재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사고 나고 3년 정도 지났을 때예요. ‘더 크게 다치지도 않고 살았는데, 이유가 있지 않을까? 지금처럼 의미 없이 치료에만 매달려서 살아야 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비록 평생 휠체어 탄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지만 이 삶도 한 번뿐이잖아요. 내가 하고 싶은 일 찾아서 ‘후회 없이 살자’고 다짐했죠.”

넘으려던 장애를 인정하고 나니 그제야 사회가 보였다. 지금은 트레이드마크가 된 긴 머리도 그때부터 길러온 것. “사고 난 이후 머리를 짧게 자르고 모자를 푹 눌러썼어요. 그런데 나를 감추거나 누를 이유가 있나 싶더라고요. 긴 생머리에 대한 환상이 있었는데, 직접 해보자 했죠.(웃음)” 그는 “긴 머리 덕분에 ‘휠체어 탄 장애인’이라는 말보다 ‘말총머리 총각’으로 더 자주 불린다”며 쾌활하게 웃었다.

◇은빛 두 바퀴, 날개가 되다

하지만 세상은 녹록하지 않았다. 특별한 기술이 없는 그가 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러던 중 지인으로부터 휠체어 댄스스포츠를 국내에 도입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한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의 초대 회장인 이춘식 회장이었다. 이 회장을 만나고 영상을 통해 본 외국 휠체어 댄스스포츠 댄서의 모습은 그야말로 ‘쇼킹’했다.

“신나는 음악에 화려한 옷, 날렵하고 멋진 동작까지. 캐나다에서 만난 장애인 친구들이 떠오르더군요. 장애를 가졌지만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살던 그 친구들처럼 저도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인력도, 인프라도 없었다. 휠체어 탄 사람이라고는 일본에서 온 시범 선수 한 명과 김 단장, 김 단장이 데려간 다른 휠체어 장애인 셋뿐. 영상을 따라 하며 수없이 넘어지고 다쳤다. 한 번 연습하면 체력적, 심리적 소모로 일주일 이상은 쉬어야 하는 날이 이어졌다. 이듬해인 2003년 3월, 김 단장은 정식으로 휠체어 댄스스포츠를 알리기 시작했다. 동호회 회원을 모집하고, 전단을 만들어 병원이나 복지관을 돌아다니며 홍보했다. 배우고 싶다는 사람만 있다면 지방까지 찾아가 강습을 열었다.

같은 해 일본 휠체어 댄스스포츠 전국 대회가 열렸다. “일본의 휠체어 댄스스포츠 역사는 우리나라보다 13년 정도 빨라요. 아시아 최강국이었죠. 참여에 의미를 뒀는데 결승에 올라가더니 6팀 중 5위를 차지했죠. 상상도 못했던 결과였어요.”

김 단장에게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왔다. “휠체어 댄스 스포츠를 시작하자마자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셨어요. 3년 정도 되자 생계에 대한 부담이 커지더라고요. 마침 홍콩에서 아시아선수권대회가 열린다기에, 이 대회를 끝으로 모든 것을 정리하리라고 마음먹었습니다. 피켓도 없이 A4용지에 ‘KOREA’를 쓰고 경기에 참여했어요. 결과요? 기적과도 같았죠.”

은퇴를 고민하던 그는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4년 연속 아시아선수권대회 챔피언 자리를 지키고, 2006년에는 세계 6위, 2008년에는 세계 4위를 기록하며 선수 생활의 정점을 찍기 시작했다. 그가 선수로 활동하는 동안 대한장애인댄스스포츠연맹이 생기고, 휠체어 댄스스포츠도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는 등 불모지였던 국내 휠체어 댄스스포츠 분야가 싹트기 시작했다.

◇에너지의 원천? ‘후회 없이 살겠다’ 다짐

그에게도 새로운 꿈이 생겼다. 국제적으로 활동하는 공연 팀을 만드는 것. “2006년 함께 공연했던 중국장애인기예단과 2007년 내한한 영국 ‘캔두코 댄스 컴퍼니’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무용수들이 1시간 이상의 작품을 만들어가더라고요. 1분 30초에 모든 걸 쏟아 붓는 댄스스포츠와는 또 다른 매력이 느껴졌어요. 그 길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꿈을 꾼 지 3년이 되던 해인 2009년 11월, 그는 1700석 규모의 고양 어울림누리 대극장에서 2시간짜리 공연을 올렸다. 휠체어 댄스스포츠 선수 김용우가 아닌, 장애인과 비장애인 무용단원들로 구성된 ‘빛소리 친구들’의 단장으로서였다. “그때의 감동은 말도 못 해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 정말 컸어요.”

지체장애 무용수 5명과 비장애 무용수 5명으로 구성된 빛소리 친구들은 매년 연말 정기 공연뿐 아니라 전국장애인무용축제, 서울세계무용축제, 부산국제무용제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에는 무용과 청각장애·시각장애 성우들의 시 낭독을 결합해 다양한 장애 유형의 사람들을 무대 위로 올리는 새로운 시도를 선보였다. 해외에서도 러브콜이 이어진다. 일본 초청 공연은 물론 지난해 4월에는 핀란드에 초청되어 1시간짜리 공연을 소화했고, 올해는 이집트를 방문할 예정이다. 오는 9월에 있을 제1회 국제장애인무용제를 준비하느라 요즘엔 눈코 뜰 새가 없다. 두 시간이 넘는 긴 인터뷰를 마치며 그에게 ‘에너지의 원천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답변은 단순 명쾌했다.

“제 인생의 화두는 ‘후회 없이 살자’입니다. 춤이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주고 앞길을 밝혀준 횃불 같은 역할을 했지만 춤의 명인이 되는 것이 목표는 아니에요. 후회 없이 살기 위해서 ‘춤’을 택했죠. 다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요. 지금, 현재, 앞으로를 생각하죠. 한 번뿐인 인생, 자신이 진짜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민해보세요. 혹시 알아요? 제가 우연히 춤을 만나게 된 것처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방법을 찾을지(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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