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목)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연탄의 추억

[박란희의 작은 이야기]

지난 연말, 더나은미래 기자들과 함께 연탄 봉사를 했습니다. 늘 다니는 성수동 지하철역 근처였는데, ‘뒷골목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은 쪽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습니다. 연탄 때는 집이 딱 두 곳밖에 없다 보니 이런 지역은 오히려 기업에서 ‘그림이 안 돼’ 거의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연탄을 나르는 우리를 못마땅한 얼굴로 지켜보던 한 노인은 “그 정도면 됐다”고 면박을 주었습니다. 반면, 중년 아줌마는 우리를 도와 열심히 계단을 오르내리며 연탄을 날랐습니다. 알고 보니 노인은 쪽방 아줌마에게 밀린 월세 독촉하러 온 집주인이었습니다. 쪽방에 혼자 산다는 아줌마는 “작년에는 초봄까지 추웠는데 연탄이 없이 지내다 다리 근육이 마비되기도 했다”며 “연탄 한 장 한 장 땔 때마다 여러분을 생각하겠다”며 고마워했습니다. 그녀의 사연이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진 못했습니다.

기자들에게 “연탄 때 본 적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저는 1년가량 연탄을 때고 ‘곤로’에 밥을 해먹는 고등학교 1학년 자취 시절을 보냈습니다. 오랜만에 연탄을 보니 그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친구와 저는 각각 월세 3만원씩 내고 쪽방에 같이 살았는데, 그 집에는 온갖 군상이 자취를 하고 있었습니다. 시시때때로 부부싸움으로 악다구니를 쓰고 가재도구를 마당에 집어던지는 중년 부부도 있었고, 가난한 집안을 일으켜 세우겠다며 세무대학 입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독학생도 있었습니다. 연탄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저는 저녁 자율학습 시간에 잠깐 빠져나와 자취방으로 내달렸습니다. 제 자취집에선 우리 고등학교의 화장실 창문이 다 보이고 친구들 깔깔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연탄불을 간 후 급히 밀린 손빨래를 하다가 문득 친구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왜 이렇게 가난할까’ 하고 눈물을 훔쳤던 기억이 났습니다.

돌이켜 보면 교육의 사다리를 잘 타서 자립을 했고, 어엿한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온 게 참으로 신기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힘들고, 외롭고, 벗어날 길 없어 보이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도 주변에 누군가 단 한 명만 있다면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가족이든, 친척이든, 이웃이든 그 누구든 말입니다. 2016년은 유례없이 불경기라고 합니다. 주변에 명예퇴직한 분들 소식도 많이 들립니다. 불평등과 양극화가 더욱 심해지겠지요.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님은 수업 시간 숙제로 “저절로는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을 찾으라”고 과제를 낸다고 합니다. 권투선수, 자살 미수자 등 평소 못 보는 이들을 인터뷰한 숙제의 결과물을 보면 전혀 다를 것 같은 이들이 의외로 자신과 비슷한 게 많다는 걸 느낀다고 합니다. 우리는 무한한 네트워크 연결 시대에 살지만, 세대와 정치적 지향, 교육, 경제적 수준에 따라 끊임없이 경계가 그어집니다.

그래서 ‘더나은미래’는 2016년 새해 특집으로 ‘1% 이야기’를 준비했습니다. 청년 기자들에게 주문했습니다. ‘조선일보 더나은미래’로 섭외하지 말고, 주변 인물이나 아는 사람 중에서 섭외를 하도록 말입니다. 우리가 만난 50명은 결코 멀리 있는, 남의 동네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더불어 함께 살 수 있는 좀더 따뜻한 한 해가 되길 기대해봅니다.

관련 기사

Copyrights ⓒ 더나은미래 & futurechosun.com

전체 댓글

제261호 2024.3.19.

저출생은 '우리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는 마지막 경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