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8일(토)

복지 그물망의 실핏줄, 야쿠르트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의 하루, 기자가 따라가보다

지자체나 주민센터가
독거노인들에게
우유나 야쿠르트 같은
제품을 지원해줘요
주부판매원들은
그들에게 매일
제품을 전하는 동시에
말벗이 돼 드리고
안부도 물으며
자연스럽게
정서적 지지자가
됩니다

“아직도 담배 잘 끊고 있으세요?”
“다친 팔은 좀 나아지셨어요?”
어느 집을 가든,
각각의 사연과
현재 이슈를 줄줄
읊을 정도

살펴보던 노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신고하는 경우도
가끔 생겨

조그만 문이 빠끔히 열렸다. 1평(3.3㎡) 남짓 좁은 방. 옷가지와 이불, 휴대용 가스버너와 그을린 양은 냄비가 널브러져 있다. “할아버지 뭐하세요? 아이고, 아침부터 무슨 술이에요.” 강미숙(58)씨가 인사 반, 잔소리 반을 건넸다. 막걸리 잔을 입에 가져가던 공민구(가명·73)씨가 “이봐라. 방이 냉골이야, 냉골”이라며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지난번 겨울 이불 나눠줄 때 못 받으셨어요? 집에만 계시니 모르잖아요. 바람도 쐬고 그러셔야죠.” 강씨의 참견은 문을 나서는 순간까지 이어진다. 두 방 건너 다시 두드린 문. 인기척이 없다. 하지만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한다. “요즘 통 못 뵈어서….” 걱정 어린 말투. 갑자기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두컴컴한 방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문을 안 열어주세요. 별일 없으신 거죠!”

한국야쿠르트의 ‘홀몸 노인 돌봄사업’이 고독사 예방의 복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홀몸 노인 돌봄사업은 전국 600개 영업점에서 활동하는 야쿠르트 아줌마 1만3000여 명이 독거노인 3만명에게 매일 발효유 제품을 전달하며, 안부를 살피고 말벗이 되어 외로움을 달래주는 활동이다.
한국야쿠르트의 ‘홀몸 노인 돌봄사업’이 고독사 예방의 복지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홀몸 노인 돌봄사업은 전국 600개 영업점에서 활동하는 야쿠르트 아줌마 1만3000여 명이 독거노인 3만명에게 매일 발효유 제품을 전달하며, 안부를 살피고 말벗이 되어 외로움을 달래주는 활동이다.

지난 14일 오전, 서울 용산구 동자동에서 만난 강미숙씨는 한국야쿠르트사의 주부 판매원, 일명 ‘야쿠르트 아줌마’다. 핑크색 유니폼을 정갈히 차려입은 강씨는 경력 16년의 베테랑이다. 매일 새벽버스를 타고 경기도 파주에서 용산까지 오간다. 1999년 남편의 사업이 힘들어져 시작한 일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여느 판매원이 그렇듯, 유제품 40여 종류를 전동 카트에 싣고 다니며, 배달하고 판매하는 게 주 업무다. 그런데 서울의 대표적 ‘쪽방’ 밀집 지대인 동자동을 맡고 있는 강씨에겐 소임이 하나 더 있다.

“지자체나 주민센터가 지역 내 독거노인들에게 저희 우유나 야쿠르트 같은 제품을 지원해줘요. 주부 판매원들은 그분들에게 매일 제품을 전하는 동시에 말벗이 돼 드리고, 안부도 물으며 자연스럽게 정서적 지지자가 됩니다.” 이상민 한국야쿠르트 홍보과장의 설명이다. ‘손에서 손으로’ 제품을 전하는 독특한 판매 시스템을 활용해 만든 ‘홀몸 노인 돌봄 사업’이다.(야쿠르트 아줌마의 방문 판매는 한국야쿠르트 매출의 95% 이상을 차지한다) 그 시작은 지난 1994년 서울 광진구청과 협약을 통해 독거노인 1104명을 돌본 것이 계기였다. 이후 21년 동안 전국으로 퍼져나가며, 현재까지 1만3000여 명에 이르는 야쿠르트 아줌마들이 3만여 독거노인들과 친구를 맺었다.

강미숙씨는 평일 오전 6시부터 오후 4시까지, 동자동 일대 250가구에 제품을 배달한다. 그중 70가구는 ‘특별히’ 살펴야 할 곳이다. “돌봄 가구 수는 지역마다 다른데, 지역 특성상 이곳은 상당히 많은 편”이라는 설명이다.

“아직도 담배 잘 끊고 계세요?” “다친 팔은 좀 나아지셨어요?”

매일 제 집 드나들듯 하다 보니 동네 사정, 어르신 상황이 훤하다. 어느 집을 가든, 각각의 사연과 현재 이슈를 줄줄 읊을 정도다. “이 집 할아버지는 전립선암에 걸리셨어요. 병원에도 잘 안 간다고 하던데 도무지 만나기가 힘드네요.” 강씨가 문 앞에 달린 헝겊 주머니에 제품을 넣으며 말했다. 마침 맞은편 문이 열리며 백발의 할머니가 나오자, 다짜고짜 “앞집 김씨 할아버지 어떤 거 같아요?” 하며 상황을 묻는다. 길거리에서 만난 황선옥(가명·76)씨와 인사할 땐 “저 연세에도 매일 동네 청소를 할 만큼 부지런하다”고 하고, 이송자(가명·73)씨 집 앞에선 “눈이 잘 안 보이는데도 옷 입는 걸 좋아하셔서, 우리 시어머니 코트를 가져다 드린 적도 있다”고 했다. 가족 대신 보호자 역할을 할 때도 있다.

“이 연립주택 4층에 살던 할아버지는 위암에 우울증까지 앓으셨어요. 식사를 거의 못 해 죽을 쑤어다 드리기도 했죠. 그런데 어느 날 혜화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그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저보고 와서 확인을 하라더군요. 저밖에 연락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안타깝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많이 울었죠.”

살펴보던 노인의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신고하는 경우도 가끔 생긴다. 강씨는 “경찰서에서 조서를 꾸미기도 하고, 별별 것을 다 해봤다”고 했다.

미상_사진_기업사회공헌_홀몸노인돌봄사업2_2015

보건복지부 독거노인종합지원센터의 김현미 실장은 “사회와 격리된 어르신들은 홀로 어렵게 살다가, 홀로 돌아가신다”며 “재작년 부산에선 5년간 방치된 어르신의 시신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최근 들어 돌아가신 후 시신이 며칠씩 방치되는 사례가 더욱 빈번해졌다”고 했다. 관할 지역을 모세혈관처럼 촘촘히 아우르는 야쿠르트 아줌마들은 효율적인 레이더망이다. 3년 전 위급한 독거노인 3명을 황급히 119에 연결해 생명을 구한 일로 화제가 됐던 전세옥(65·27년간 용산구 한남동 담당)씨는 “십수 년을 한 동네, 같은 동선에서 일하면 자연스럽게 내가 들여다봐야 할 가족처럼 여겨진다”고 했다.

“이거 하나 잡숫고 가, 커피도 마시고.”

정오가 다가올 무렵, “독거노인이 계신 곳 중에선 마지막”이라고 소개한 집에서 만난 정순빈(가명·69)씨가 강씨를 안으로 들이려 한다. 기자가 “(야쿠르트 아줌마) 평소 어떠시냐”고 묻자 정씨의 얼굴이 환해진다.

“우리 아줌마 너무너무 고생해. 자기도 먹고살려고 나왔을 텐데, 어른들 신경만 쓰고 말도 참 곱게 하고. 안 지 10년이 넘었는데, 저렇게나 한결같을까….” 강씨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쏟아내는 칭찬이 그칠 줄 모른다.

야쿠르트 주부 판매원은 사실 생계형 일자리에 가깝다. 판매액을 회사와 나누기 때문에 더 바삐 움직여 더 많이 파는 게 이익일 법도 한데, 이들은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다. 강씨는 “어제 급체해서 몸이 안 좋았는데, 오늘 이렇게 또 나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니까 훨씬 좋아졌다”며 “집안 문제 때문에 골머리를 앓다가도 여기 와서 유니폼만 입으면 다 잊어 버린다”고 했다.

서울 양천구 신정동을 거점으로 활동하는 13년 경력의 판매원 신영숙(50)씨는 “어르신들이 정에 굶주리신 만큼, 많은 정을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사실 유제품은 시간을 딱 맞춰 전달해야 하거든요. 늦으면 불평하시는 분도 많죠. 근데 몸이 아파 집에만 계시는 할머니들이 내 손을 잡고 ‘외롭다’ ‘서럽다’고 우시면 발이 안 떨어져요. 잠깐 짬 내서 어깨라도 주물러드리면, 다음 날엔 고사리나 감자 같은 걸 준비해놓고 기다리시죠.” 금은방을 하다 이 일로 들어선 신씨는 “13년 동안 단 한 번도 그만둘 생각을 하지 않았던 소중한 일자리”라는 말로 야쿠르트 아줌마로서 자부심을 드러냈다(실제로 야쿠르트 아줌마의 평균 근속 연수는 10년에 육박한다).

강미숙씨 역시 “이 일이 나를 성장시켰다”고 했다. “쪽방촌 처음 왔을 땐 사실 많이 놀랐어요. 좁고, 지저분하고, 냄새도 심했죠. 여기서 어떻게 살까 싶었는데, 이젠 이 동네가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소중한 곳이에요. 일 시작할 때 다섯 살이었던 막내가 올해로 스물한 살이거든요. 우리 가족을 지켜주고, 나를 키워준 인생의 텃밭입니다. 제가 갚아드려야죠.”

우리나라의 노인 5명 중 1명은 고독과 싸운다. 지난 2000년 54만명이었던 독거노인 수는 올해 150만명을 바라보고 있다. 노인 우울증이나 자살 같은 부작용은 이미 심각한 사회문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 5년간(2009년~2013년) 우울증으로 치료받은 환자 5명 중 3명이 50대 이상 노인이며, 인구 10만명당 자살률도 60대(40.7명)가 10대(4.9명)보다 10배가량 높다. 정부에서 2008년부터 ‘독거노인 생활관리사’를 파견해 독거노인 22만명(2015년 기준)을 정기적으로 찾고 있지만, 보살펴야 할 대상자 수가 워낙 급격히 늘다 보니 그들만으론 역부족인 게 현실이다. 김현미 실장은 “가끔 말벗이 되어 주거나 안부를 확인하는 일이라도, 독거노인들에겐 세상을 잇는 유일한 연결 고리가 될 수도 있다”며 “국가의 손길이 닿지 못하는 곳이 많은 만큼, 기업들이 더 많이 나서 준다면 국가 정책과 기업 자원의 시너지가 확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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