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7일(화)

[더나은미래 논단] CSR의 투명한 천장

이윤석 InnoCSR 대표

이윤석 InnoCSR 대표
이윤석 InnoCSR 대표

CSR(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정의에 대해서는 지난 10년 이상 동안 전 세계에서 계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 특히 우리나라는 CSR, CSV(공유가치창출), 사회공헌, 지속가능발전이라는 개념이 혼재되어 있어, ‘CSR=사회공헌’이라는, 다른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비정상적인 정의까지 내려지고 있는 상황이다.

CSR은 기업이 어떻게 돈을 쓰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어떻게 돈을 버느냐의 문제다. 따라서 기업의 비즈니스 모델과 많은 연관성을 가진다. 기업이 브랜딩이나 마케팅 측면으로 사회공헌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력 사업들을 검토하고 시행할 때 사회와 환경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의 기업 구조는 오로지 밀턴 프리드먼과 애덤 스미스가 얘기했던 과거형 수익 창출에 맞춰져 있다. 구매에서부터 제조, 판매까지 이어지는 사업의 밸류 체인을 보면,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지속적으로 보인다.

구매팀을 예로 보자면, 소수의 구매 담당자가 많은 협력업체를 상대한다. 한 사람이 보통 흔하게는 수십 개 협력업체를 매월 상대한다. 이들은 기존의 협력업체들을 관리하고, 회사에 필요한 자원을 구매함과 동시에 신규 협력업체들도 발굴해야 한다. 간혹 사고가 나고, 이를 협력업체들과 해결하는 일도 도맡아서 한다. 이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구매 요소들은 낮은 가격, 높은 품질, 그리고 빠르고 안정적인 생산과 공급이다. 이렇게 바쁘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는 구매팀에 어느 날 회사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며, 윤리강령과 CSR 감사 제도를 정책화한다. 구매팀은 그 내용도 정확히 숙지하지 못한 채, 이를 협력업체들에 강조하고 협력업체 평가 요소에 반영한다.

협력업체들 역시 이를 즉시 비용으로 인식한다. 가장 낮은 원가로 높은 품질로 만들어서 빠르게 운송하는 것에 맞춰져 있는 그들의 비즈니스 모델에 노사, 환경, 부정부패 근절 등의 새로운 요소들이 추가되면서, 바로 구조를 바꾸거나 우회해야 하는 비용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협력업체들은 여러 조건을 동시에 맞추기 위해 제품의 품질을 조금씩 낮추게 되며, 이는 결국 소비자들의 피해로 돌아간다. 경우에 따라서는 안전을 위협하는 품질 저하가 될 수도 있다.

최근에 유럽에서 발표된 논문에 의하면,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들을 ‘CSR의 투명한 천장(Glass Ceiling of CSR)’이라 표현하고 있다. 원래 투명한 천장은 인사(HR) 쪽 경영 용어로서, 소수 계층(여성·소수민족)이 기업에서 승진하는 데 가려진 보이지 않는 장벽을 뜻하는 용어다. 이 이론에서 상업적인 이익 추구 마인드만 가지고 CSR을 접했을 경우에 기업들은 매우 기회주의적일 수밖에 없으며, 위에서 필자가 언급하였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굳이 해결하지 않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이러한 기업의 행태가 그 기업 직원들의 사기에 큰 악영향을 미친다고 결론짓는다.

글로벌 무대에서 이러한 비즈니스 모델을 처음부터 재검토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 한꺼번에 바꾸지 못한다면, 최대한 효율적으로 단계별 변화를 추구한다. 앞서 얘기한 구매팀과 협력업체의 문제도 ISO 26000(사회적 책임의 국제 표준)을 기업의 구매팀에서 인정하고 채택하는 트렌드가 최근 두드러지게 보인다. 이렇게 함으로써 기업은 독자적인 윤리강령과 CSR 감사 등의 비용을 절감할 수 있으며, 협력업체들 역시 ISO 26000만 준수하면 되기 때문에, 여러 바이어에게서 오는 각기 다른 제도들을 전부 도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인증서 제도가 없어서 등한시되던 ISO 26000도 이런 맥락에서 점점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ISO는 최근 지속적인 구매(Sustainable Procurement) 가이드라인을 작업하고 있다고 한다.

보여주기식 CSR과 불필요한 개념 전쟁은 이제 그만해야 할 때다. 최소한 사회공헌과 CSR을 혼돈하지는 말아야 한다. 좋은 사회공헌 프로그램은 당연히 필요하고 기업 활동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칫 마약을 팔아 병원을 지어주는 위선적인 기업이 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공헌 프로그램을 시작해놓고, 끊임없이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어야 하는 ‘자선의 덫’에 걸리기도 쉽다. 기업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사회와 환경을 고려하는 사업 모델이 기업의 구조적인 변화와 함께 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체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구조적인 변경을 하기 위해서 기업의 최고 의사 결정자들의 결단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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