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2일(금)

“동락가의 문은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비영리 활동가 아지트 ‘동락가’ 이야기

서울 종로구 경희궁 인근 주택가에는 ‘동락가’라는 이름의 비영리 활동가 공간이 있다. 사진은 13일 동락가에 모인 비영리 활동가들의 모습. /이건송 C영상미디어 기자

서울 종로구 경희궁길 32. 대문 앞에 ‘동락가(同樂家)’라는 명패가 붙은 저택이 있다. 지난 30여 년간 대기업 회장님댁으로 불리던 곳이다. 굳게 닫혔던 대문은 2020년부터 열렸다. 청년들이 매일 드나들었고, 고요하던 집에 웃음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비영리 활동가들의 아지트 동락가는 업무 공간인 동시에 네트워킹 거점이자 시민을 만나는 행사 공간이다. 사회문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해결하는 ‘비영리 스타트업’들이 이곳에 입주해 있다. 입주 기간은 최대 15개월, 비용은 무료다. 이들을 지원하고 공간을 운영하는 역할은 다음세대재단에서 맡고 있다.

공간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다음세대재단에 따르면, 동락가 누적 방문자 수는 총 4201명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된 2020년 845명에서 이듬해 1010명, 2022년 1137명, 올해 11월 기준으로 1209명으로 집계됐다. 방대욱 다음세대재단 대표는 “골목길 주택에 매년 수많은 사람의 발길이 잇따른 건 공간의 힘”이라며 “불과 4년 만에 비영리 생태계의 다양성을 키우는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고 말했다.

13일 비영리 활동가들의 공간 ‘동락가’에서 비영리스타트업 역량 강화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이건송 C영상미디어 기자

회장님댁이 비영리 아지트로

동락가는 대림산업 이준용(85) 명예회장이 33년간 머물렀던 자택이다. 1985년 10월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로 지어졌다. 대지 면적 991㎡에 건물 연면적 584㎡(약 176평)의 대형 주택이다. 이 명예회장은 2019년 1월 고(故) 김수환 추기경의 나눔 정신을 이어받은 재단법인 ‘바보의나눔’에 건물을 기부했다. 당시 개별 주택 공시가격은 76억원으로 시가 100억원이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보의나눔은 주택을 매각하지 않고 이듬해 다음세대재단과 부동산 무상 임대 계약을 통해 비영리 활동가들의 공간으로 쓰일 수 있도록 했다.

지난 8일 오후 1시 비영리 활동가들이 현관 앞에 삼삼오오 모여 인사를 건넸다. 얼굴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올해 1월부터 동락가에 머물렀던 코다코리아가 떠나는 날이다. 이길보라 대표는 현관문 앞에서 “또 올 거예요”라며 웃었다.

코다코리아는 농인 부모의 자녀를 뜻하는 코다(CODA)들의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인식 개선·국제 교류 활동을 하는 단체다. 지난 2014년부터 활동을 시작했지만 1년 전만 해도 마땅한 공간 없이 일해왔다. 이길보라 대표는 “주요 활동 중 하나가 코다들의 네트워크를 넓히는 건데 정작 사람들을 모으고 교류할 공간이 없었다”며 “입주 이후 인큐베이팅 사업을 통해 단체 고유 사업을 기획하고, 매년 전 세계 코다들이 모이는 ‘코다 국제 콘퍼런스’도 한국에서 개최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어 “법인격을 갖추지 않은 2~3명 규모 작은 단체가 모여 함께 성장할 기반을 마련하는 공간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생산 공정의 휴면 자원을 어린이 놀잇감으로 전환하는 ‘자원(ZAONE)’은 동락가에 재입주한 케이스다. 이수영 자원 대표는 “비영리 관련 정보를 빠르게 접할 수 있고 활동가 네트워킹을 확장할 수 있는 공간으로 이만한 곳이 없다”며 “다른 곳으로 사무실을 구했다가 다시 돌아올 자리가 있다고 해서 재입주를 결정했다”고 말했다.

동락가 지하 1층에 마련된 비영리스타트업 전시 공간. /이건송 C영상미디어 기자

마당이 있는 사무실

동락가에 머문 비영리 스타트업은 지금까지 총 24곳이다. 아동·청소년 대상으로 ‘나다움’을 찾는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교육자를 양성하는 ‘유스보이스’, 정원을 가꾸는 가드닝(gardening)을 사회적 활동으로 확장해 공동체 가치와 생태계 회복을 유도하는 ‘마인드풀 가드너스’, 무업 기간 사회적 단절을 경험하는 청년들을 연결하는 ‘니트생활자’, 옷장 속에 잠자는 옷을 교환하는 ‘21% 파티’ 개최로 지속 가능한 의생활 문화를 조성하는 ‘다시입다연구소’ 등이다. 재단은 동락가 입주자를 ‘그루’라고 표현한다. 지금까지 100그루 넘는 비영리 활동가가 동락가에서 일했다.

사회적 협동조합 ‘오늘의행동’의 공동 창립자 서경원, 정경훈씨는 비영리 2막 인생을 동락가에서 시작했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재단을 비롯한 비영리 단체 경력만 20년 가까이 되는 베테랑 활동가다. 반대로 ‘다시입다연구소’의 정주연 대표는 프랑스 대사관과 파리 한국문화원 등에서 일해온 비영리 경력이 전혀 없는 초보 활동가였다. 다양한 경력을 보유한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비영리 활동을 한 공간에서 이뤄내고 있는 셈이다.

정주연 대표는 동락가에 처음 온 날을 기억한다. “2021년 9월이에요. 대문이 엄청 크잖아요. 처음에는 ‘들어가도 되나’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은 제집 드나들 듯 하지만요. 공간이 생기면 많은 게 달라져요. 명함에 주소를 넣고, 우편물도 받고, 원하면 늦게까지 일하고요. 마당에서 ‘21% 파티’도 열어서 사람들을 모았어요.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내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게 참 소중한 거예요. 외부 사람을 초대해서 만나기도 하고, 다른 단체를 만나러 온 사람들을 소개받기도 했어요.”

다시입다연구소는 동락가에서 1년 6개월 지내다가 지난해 성수동 헤이그라운드로 자리를 옮겼다. 정 대표는 “동락가는 힘들 때나 기쁠 때나 떠오르는 친정 같은 느낌”이라며 “일에 쫓겨 정신없이 바쁜 시기였지만 사계절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변화의 기초를 만드는 사람들

명분 있는 ‘좋은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다음세대재단은 2019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비영리 스타트업 육성 사업을 시작했다. 다양한 분야의 소규모 비영리 단체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사업이다. 가장 큰 고민은 공간이었다. 공유 오피스를 찾아다니던 와중에 바보의나눔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종로구 단독주택을 비영리 활동가들의 공간으로 쓰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방대욱 다음세대재단 대표는 “선물 같은 일이었다”며 당시를 기억했다. 바보의나눔은 주택을 근린생활시설로 변경하기 위한 리모델링 공사를 해줬다. 사무 공간 구성은 이케아코리아에서 맡았다. 전문 디자이너들이 협업 공간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추천했고 사무용 책상과 의자, 회의 테이블도 제공했다. 정원사의 손길이 필요한 조경 비용은 SK머티리얼즈의 기부금으로 충당했다.

비영리 스타트업의 성장을 위한 ‘백오피스’ 구축 사업도 속도를 냈다. 크레비스파트너스는 모금 설루션을 지원했고, 법무법인 율촌과 사단법인 온율은 법률 지원, 영림원소프트랩은 회계 관리 시스템을 제공했다. 이 모든 게 동락가라는 공간이 생긴 이후 일어난 일이다. 방대욱 대표는 “비영리 활동에 가장 필요한 자원은 공간과 인건비인데, 이 부분을 선뜻 지원하는 기부자들은 변화의 기초를 만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올해로 4년째, 동락가는 벤치마킹 대상이 됐다. 공간 활용을 고민하는 조직들이 전국에서 투어 문의를 해온다. 방대욱 대표는 “제주, 대구, 부산에서 이곳까지 와서 꼼꼼히 둘러보고 간다”며 “업무 미팅을 잡을 때도 직접 오겠다는 클라이언트들이 예전보다 부쩍 많아졌다”고 말했다. 그는 “공간 운영이라는 걸 처음 해봤지만 모든 걸 기획하고 시스템을 갖추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며 “사람 냄새 나는 공간인 동락가가 앞으로도 계속 운영되길 바란다”고 했다.

문일요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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