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금)

서류 퇴짜만 10번… 만들다 지치는 협동조합

시행 1년 맞은 협동조합기본법
영리회사서 조합 전환 2.3%뿐, 법 개정 늦어져 증여세 폭탄
설립 때 필요 서류 방대해 준비에만 상당 기간 소요
수익 창출 조합은 불과 54%, 골목 상권 위주로 만들어져
대부분 조합원 수 10명 미만 수익 구조 못 갖춘 곳이 태반

“수요일 7시가 되면 사무실 불을 모두 끕니다. 직원들이 퇴근을 너무 안 해서요.”

서울 동대문구 장안동에 있는 ‘해피브릿지’. ‘국수나무’ ‘화평동왕냉면’ 등 전국 400여개 외식업소를 운영하는 프랜차이즈 본사다. 최근 이곳에서는 정시 퇴근 캠페인이 펼쳐진다. 직원들이 뜻을 모아 자율 근무제를 정착시켰는데, 업무 욕심을 부리는 직원들이 속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주식회사에서 협동조합으로 전환한 이후 생긴 변화다. 송인창 해피브릿지 이사장은 “직원들이 조합원이 되면서, ‘회사의 성장 없이는 나도 발전할 수 없다’는 의식이 커졌다”며 “현재 경영 전반을 조합원이 선출한 이사회가 맡고 있는데, 이사 중에는 평사원도 많다”고 했다. 하지만 해피브릿지는 협동조합 창립총회까지 마쳤지만, 법적으론 아직 주식회사다. 증여세만 6억원을 내야 한다는 법 해석 때문이다. 송 이사장은 “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조합원 60여명이 1인당 1000만원 (이상) 출자금을 냈는데, 국세청에서는 이 출자금을 6억원이 아닌 120억원의 가치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해피브릿지가 상장했을 때의 시장가치를 현 자본금의 20배로 보기 때문이다. 송 이사장은 이어 “출자금은 주식시장에서 사고 팔리는 유가증권과 달리 조합원으로서 출자했다는 증표일 뿐”이라며 “이를 시장가치로 매기는 것은 협동조합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부족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본법 도입 이후 설립된 협동조합은 현재 3000개에 육박한다. 전문가들은 "현 시점에서는 설립(전환)된 조합들이 어떤 상태인지 진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조선일보 DB
기본법 도입 이후 설립된 협동조합은 현재 3000개에 육박한다. 전문가들은 “현 시점에서는 설립(전환)된 조합들이 어떤 상태인지 진단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조선일보 DB

◇기본법 도입 1년, 본래 취지 잘 살렸나?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된 지 1년이 지났다. 협동조합 설립 붐을 이뤘던 도입 초창기와 달리, 인식이나 제도적 뒷받침 부족으로 법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김기태 한국협동조합연구소 소장은 “법을 만들 때는 영리회사나 사회적기업들이 활발히 협동조합으로 전환할 것이라 기대했지만, 현실은 다르다”고 했다. 지난 15일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협동조합 실태조사’ 자료에 따르면, 타 사업체로부터 협동조합으로 바꾼 사례는 2.3%에 그쳤다(2013년 5월 기준). 세법·상법 등 관련 제도의 정비가 늦어지고 있어서다. 김 소장은 “귀농인이나 농업인이 농림축산식품부에 농업회사법인으로 등록하면 투자나 세제 등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데, 농민들이 모여 만든 농업협동조합은 그 지원을 받지 못한다”며 “(협동조합 전환 시) 지원은커녕 불이익을 당할 여지가 있는 만큼, 기본법의 뒤를 잇는 제도 정비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협동조합 업무를 담당하는 공무원의 인식 부족으로 신규 설립도 쉽지 않다. “발기인 모집, 정관 작성, 사업 계획서…. 내용도 방대하고, 서류작업도 어려웠어요. 서류 퇴짜만 10번 넘었죠. 궁금한 걸 문의해도 속 시원한 대답은 없었어요. ‘다른 부서로 가보라’며 뺑뺑이 돌기 일쑤였죠. 관련 공무원들이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녹색교육 공동체 관련 협동조합을 준비 중인 장미자(가명·55)씨가 조합 설립을 준비한 건 올해 초부터. 장씨는 “높은 문턱을 여러 차례 실감했다”고 한다. 이상훈 성공회대 경영학과 교수(협동조합인큐베이팅센터 소장)는 “석·박사들로 이뤄진 동료·후배들이 지식협동조합을 만들었는데, 서류가 미비해서 3번이나 퇴짜를 맞았다”며 “정부에서 교육이나 컨설팅 등을 지원하고 있지만, 실제 운영상의 문제점에 대해 상담하고, 이를 속 시원히 답변해줄 수 있는 일관된 지원 체계가 부족한 편”이라고 했다.

미상_그래픽_협동조합_신청현황누적집계_2013

◇설립은 계속 느는데… 열악한 수익성, 쏠림 현상 등은 아쉬워

법 시행 이후, 설립된 협동조합은 총 2943개(10월 31일 기준). 하지만 전체의 65%가 골목 상권의 ‘사업자협동조합’ 형태로, 쏠림 현상이 심하다. 설립된 협동조합의 조합원 수는 10명 미만(68.4%)이 가장 많고, 평균 출자금은 약 2150만원에 그쳐 대부분 영세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처 수익 구조를 갖추지 못한 곳도 많다. 기재부 자료에 따르면, 설립 후 사업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협동조합은 54.4%에 불과했다. 절반가량은 사업 운영 자금(33.4%), 수익 모델 구축 미비(22.3%), 조합원 미확보(14.1%) 등의 이유로 아직 시장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다. 서울시 1호 협동조합으로 야심 차게 출발했던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도 그 중 하나다. 대리운전 업계의 불공정 관행이나 기사의 열악한 처우를 깨고자 올해 2월 설립했지만, 1년 가까이 벌어들이는 게 없다. 이창수 한국대리운전협동조합 이사장은 “장기적인 관점에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 때까지 사업 활동을 미루고 있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이윤이 없으니, 조합원 확보도 쉽지 않다. 전국의 대리운전 기사는 20만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이곳의 조합원은 창립총회 당시 함께했던 22명뿐이다.

한편 영리보다는 사회적 가치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협동조합’의 숫자는 총 127개로, 전체의 4.3%에 불과하다. 설립 신청 건수도 지난 8월 이후 급격히 줄고, 10월에는 총 4건에 그친 상황이다. 전문가들은 “기재부에서 11곳(16곳 신청)을 인가할 때, 복지부에선 3곳(13곳 신청)만 통과시키는 등 부처별로 인가 기준이 판이하고, 기준이 지나치게 까다로운 면이 있다”고 했다.

조합원 1인1표제를 통해 대주주의 독주를 막고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 협동조합은 그동안 주식회사에 맞먹는 자본주의의 한 축으로 잔뜩 기대를 받아왔다. 국내에도 잘 정착할 것인가, 아니면 꽃도 피지 못한 채 사그라질 것인가. 협동조합은 지금 기로에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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