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7일(화)

돌 무더기서 딸을 재운 엄마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괴물 태풍이 휩쓴 지 보름… 필리핀 구호현장 르포
구호품 트럭에 수백명 몰려 아이들 도로 한복판서 압사
시신·건물 더미 나뒹굴어 전염병 예방·주택 정비 시급
SNS로 효율성 높인 한국 NGO, 아름다운동행 등 20개 단체
구호 현장 정보 실시간 공유 아이티 참사 때보다 대응 빨라

21일 오후, 한국 공군 수송기에서 내려다본 필리핀 타클로반엔 땅 위로 솟은 물체를 찾기 어려웠다. 세부 공군기지에서 가득 싣고 온 각국 정부·NGO의 구호물자와 함께 공항에 발을 디뎠다. 말이 공항이지, 엿가락처럼 휜 빨간 철골만이 이곳이 공항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탈출’을 기다리는 주민 200여명이 철조망 주위로 빙 둘러서 있었다. 도시의 95%가 쓸려나가고, 서울시 전체 인구보다 많은 피해자 1200만명을 남긴 태풍 ‘하이옌’의 흔적은 보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였다.

긴급 구호 현장의 문제는 이번에도 그대로 드러났다. 이날 오후, 하얀 트럭에 식료품을 가득 실은 해외 NGO가 사람들에게 콜라를 던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배분 탓에, 도로 한복판으로 주민 수백명이 몰렸고, 이 과정에서 아이 몇 명이 깔렸다. 뒤늦게 부모들이 발견했지만, 압사한 후였다. 그로부터 30㎞ 떨어진 마을에선 몇몇 국제 NGO가 쌀·생필품·의약품 등을 중복해서 나눠주고 있었다. 이경신 국제개발협력민간협의회(이하 KCOC) 대외협력팀 부장은 “긴급 구호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물품 배분 방법”이라면서 “2010년 아이티 재난 때도 일방적 분배, 중복 지원이 많이 벌어져 반성의 목소리가 나왔다”고 말했다.

지난 8일, 태풍 하이옌이 불어닥친 자리엔 건물 잔해들만 남았다. 폐허로 변해버린 집 더미에 웅크리고 앉은 가족들이 허망한듯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정유진 기자
지난 8일, 태풍 하이옌이 불어닥친 자리엔 건물 잔해들만 남았다. 폐허로 변해버린 집 더미에 웅크리고 앉은 가족들이 허망한듯 먼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정유진 기자

◇SNS로 실시간 정보 공유… 협력으로 구호 현장 업그레이드

이번 필리핀 재난 현장에서 긴급 구호 중인 한국 NGO들은 어떤 모습일까. 21일 밤 11시, 타클로반 시내에 있는 라리카 호텔 607호에 한국인 10여명이 모여들었다. 한국 국제구호·개발 NGO 담당자들이었다. 이들은 이날 진행한 배분 사업을 공유하고, 이후 일정을 조율했다. 회의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다. 어느 지역에 어떤 도움이 필요한지 정보를 교류하고, 한 팀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SNS 덕분에 소통은 더 쉽고 활발해졌다. 필리핀 현장의 활동가들과 서울의 본부 실무자들이 공동 카카오톡 채팅방을 만들어 실시간 대화하고 있는 것. 굿네이버스, 기아대책, 밀알복지재단, 굿피플, 글로벌호프, 아름다운동행 등 20여 단체 담당자들이 그 멤버다. “오늘 폴레 지역 2000가구에 구호 물품을 배분했는데, 옆 마을에서도 도움을 요청해왔습니다. 혹시 500가구에 물품 지원 가능한 단체 있나요?” “타클로반 시내 A 건물에 지금 전기 들어옵니다. 필요한 분들 들르세요” “기완 지역에도 육로 뚫렸습니다. 오늘 들어가보니 피해가 심각하네요” 등 하루 500건이 넘는 대화가 오고 간다. 안형구 굿네이버스 필리핀 지부장은 “세부에 물량이 다 떨어진 상태라 우리가 마닐라에서 육로로 물품을 들여온 정보를 단체들과 공유했다”면서 “물품 구매 및 이송 루트에 대한 정보 공유가 이뤄져 배분이 더 빠르게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노영선 KCOC 대외협력팀 과장은 “잠시 한국에 귀국한 실무자나 본부 직원들이 지원 대책을 세우고 준비하기 수월해졌다”면서 “아이티 참사 때와 확연히 달라진 한국 국제 개발 NGO의 구호 풍경”이라고 귀띔했다.

지난 23일 공익기부재단 아름다운동행과 조계종사회복지재단은 타클로반, 똘로사, 기안 지역에 식료품, 생필품 등 구호키트를 전달했다. 구호 물품을 지역청년들과 함께 주민들에게 나누는 모습.
지난 23일 공익기부재단 아름다운동행과 조계종사회복지재단은 타클로반, 똘로사, 기안 지역에 식료품, 생필품 등 구호키트를 전달했다. 구호 물품을 지역청년들과 함께 주민들에게 나누는 모습.

◇타클로반보다 열악한 지역 많아… 전기·위생·주택 재건 시급해

NGO 간 협력의 시너지는 현장으로 이어지고 있다. 23일 오전, 타클로반에서 동남쪽으로 350㎞를 달리자, 폐허가 돼버린 ‘기안(Guiuan)’ 지역이 눈에 들어왔다. 4만7000명이 살고 있던 기안은 태풍 하이옌의 타격을 가장 먼저 받은 마을이다. 사망자는 100여명으로 알려졌지만, 시신 수색이 전무했던 터라 정확한 피해자 수는 알 수 없다. 이곳을 처음 발견한 공익 기부 재단 ‘아름다운동행’은 쌀, 생필품 등 구호 키트 4000개를 각 가정에 나눴다. 아름다운동행은 2008년 불교계 최초로 세워진 공익 기부 재단으로, 현재 조계종 사회복지재단과 함께 필리핀 긴급 구호를 진행하고 있다. 태풍 피해가 심각한 타클로반, 똘로사, 기안 지역에 총 2억원 상당의 구호키트를 전달했다. 김동훈 조계종 사회복지재단 나눔사업부 부장은 “전 세계의 지원이 타클로반에 집중되고 있는데, 기안처럼 피해가 심각한데도 소외받는 지역이 많다”면서 “기안으로 들어가는 육로가 끊겼단 잘못된 정보가 있었는데 우리의 지원 소식을 듣고, 다른 국내 NGO들도 연이어 들어와 함께 지역을 나눠 구호 물품을 전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후가 되자, 기안 시청 앞으로 대형 트럭 4대가 들어왔다. 대한불교 조계종 사회부 국장 혜만 스님은 “각 마을 대표들을 한자리에 모아 주민 모두에게 고르게 배분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는데, 청년들이 주체가 돼 구호 물품을 직접 전달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태풍 피해 보름째, 거리에선 시장이 들어서는 등 조금씩 활기가 보였다. 그러나 건물 잔해, 음식 쓰레기, 시신 등이 제대로 치워지지 않은 상태로 온종일 비가 내려 수인성 질병이 우려되는 상황. 전기·수도 등 인프라 정비와 주택 재건도 시급하다. 타클로반에서 30㎞ 떨어진 톨로사 지역은 95%가 집을 잃었다. 코코넛 농장과 공장들이 무너져, 일자리도 사라졌다. 조세핀(48)씨는 “열 살 딸아이를 무너진 벽돌 더미에서 재워야 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했다. “음식과 물은 지원이 시작돼 그나마 낫지만, 당장 집을 어떻게 고쳐야 할지 막막해요. 주변 나무를 주워다가 남편과 집을 짓고 있는데, 또 하이옌 같은 태풍이 오면 어떻게 될지 두렵습니다.”

태풍의 상처를 치유하기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관심과 도움이 절실한 이유다.

※후원 문의: 공익기부재단 아름다운동행(02-737-9595)

타클로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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