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목)

소외감이 사라졌다, 예술적으로

예술, 사회를 바꾸다

올해 초, ‘소록도’가 들썩거렸다. 전라남도 고흥군에 위치한 소록도병원 뒤편 중앙공원 연결 통로에 길이 110m, 높이 3m 크기의 옹벽 벽화가 완성된 것이다. 한센인이라고 거부당하고 격리당한 아픔을 가진 소록도 주민들의 얼굴을 모자이크로 표현했다. 주민들은 한없이 부끄럽게만 여겼던 자기 얼굴이 새겨진 석판에 직접 아크릴 물감을 칠했다.

‘소록도 벽화 프로젝트’는 남포미술관의 곽형수 관장이 제안하고 박대조 작가 등 공공미술 전문가 10여명이 재능기부로 참여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이하 아르코)의 크라우드 펀딩(Crowd Funding·대중으로부터 웹이나 SNS를 통해 자금을 모으는 방식)을 통해 재원을 마련했다. 목표액인 3000만원을 초과 달성하면서, 대중도 공감하는 예술 프로젝트로 알려졌다. 곽형수 관장은 “전국 각지에서 따뜻한 응원과 뜨거운 관심을 보여준 것이니만큼 벽화를 통해 소록도가 희망이 넘치는 밝은 공간으로 변화되길 기대한다”고 했다. 문화예술에는 어떤 힘이 있는 것일까. 예술이 사회를 바꾸고 있는 현장을 찾았다.

1 장애인 예술극단 ‘애인’. 2 소록도병원 뒤편에 그려진 옹벽 벽화 전경. 3 김선우 시인의 ‘민들레문학특강’ 현장. /극단'애인' 제공
1 장애인 예술극단 ‘애인’. 2 소록도병원 뒤편에 그려진 옹벽 벽화 전경. 3 김선우 시인의 ‘민들레문학특강’ 현장. /극단’애인’ 제공

◇문학으로 노숙인 자활 돕는 ‘민들레문학특강’

“제목. 새벽 나그네. 반짝반짝 새벽별 분주한 나그네 통딱딱 통딱딱 노련한 칼솜씨….”

20명 남짓 모인 서울 혜화동의 ‘아르코 미술관’ 강의실. 청중을 마주 보고 의자에 앉은 김정훈(가명·45)씨가 작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자작시를 읽어 내려가자 방 한가득 마이크 울림으로 가득 찼다. ‘통딱딱 통딱딱’ ‘부글부글’. 같은 단어가 반복되며 운율이 더해지고, 김씨의 호흡에 따라 시 행간마다 고요한 적막이 흐른다. 더러는 지그시 눈을 감고, 더러는 팔로 고개를 받치고서 김씨가 천천히 읽어 내려가는 시 구절에 잠겨든다. “제가 오랫동안 새벽에 식당일을 했거든요. 그때 참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는데….” 시 낭송을 마친 김씨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뒷이야기를 전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쏟아진다. 지난 16일 저녁, 김선우 시인과 함께하는 ‘민들레문학특강’ 현장이다.

‘민들레문학특강’은 문인들의 자발적인 재능기부로 노숙인·쪽방촌 거주자 등 주거 취약 계층에게 문학 특강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해에는 서울 시내 노숙인 시설 20곳에서 4회씩 진행했지만, 올해는 10회로 커리큘럼을 늘렸다. 아르코 정대훈 차장은 “노숙인들은 평소 지속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낼 기회가 적기 때문에 과정을 확대했다”고 했다. 김선우 시인은 “문학, 글쓰기는 내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에 치유력이 있다”면서 “은행원, 서울대 대학원 출신의 수강생도 있는데, 경제 위기나 상황에 따라 누구나 노숙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이들의 자활 의지를 응원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8월 1일부터 9월 30일까지 ‘제2회 민들레예술문학상’ 대회도 진행 중이다. 올해는 수상자를 30명으로 늘리고 시민들이 모금에 참여하는 크라우드펀딩 방식으로 시상금을 모으고 있다. 이 대회를 응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르코의 ‘예술나무’ 웹사이트(www.artistree.or.kr)를 통해 1인당 3000원 이상 기부할 수 있다. 모금 기간은 10월 31일까지, 목표 금액은 1500만원이다. 30명에게 50만원씩 주어지는 상금은 임대주택에 입주할 보증금으로 사용된다. 아르코 권영빈 위원장은 “소록도 벽화 프로젝트처럼 민들레예술문학상도 목표 금액을 달성해서 이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이 예술을 통해 희망을 갖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연극으로 사회 인식 변화시키는, 장애인 예술극단 ‘애인’

“우리는 장애인이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할 수 없었다고 생각했던 일에 도전해보기로 했다. 그것이 우리에겐 연극이다.”(극단 ‘애인’ 대표 김지수, 아르코 2012 장애인 문화예술 지원 사업 체험수기집 중)

예술을 통해 사회 인식을 바꾸는 이들도 있다. 2007년 겨울, 장애인은 ‘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기 위해 장애인 10명이 직접 나섰다. 전문 극단 ‘산’의 연출가와 배우, 작가들의 도움을 받아 연극 공부를 시작했고 3년이 흘러 2010년 첫 공연을 열었다. 이후 3년 동안 ‘고도를 기다리며’ 한 작품만을 올렸다.

극단 ‘애인’의 대표 김지수(지체장애 1급)씨는 “우리만의 움직임과 표현 방식을 찾아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보통 공연이 잡히면, 3~4개월의 연습 기간을 잡는다. 대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말하기 편한 단어’로 바꾸는 작업을 가진다. 특히 공연장에서 리허설 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진다. 조명과 공연장의 동선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서다.

지난 8월에는 극단 ‘애인’이 ‘제13회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로 대상, 연출상, 남자 연기상을 모두 휩쓸면서 주목을 끌었다. 비장애인 극단 6곳과 경쟁해서 이룬 쾌거였다. 포조 역을 맡은 강희철(지체장애 1급)씨는 휠체어를 타고 연기를 했다. 중학교 때부터 연극을 접했던 배우 한정식(지적·지체장애 1급)씨는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장애를 예술로 승화시켜 더 좋은 연기를 보일 수 있으면 가능할 것”이라고 답했다.

극단 ‘애인’은 지난해 아르코의 ‘(복권) 장애인 창작 및 표현활동 지원 사업’에 선정되면서 ‘장애, 제3의 언어로 말하다’라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일 수 있게 됐다. 이 공연은 ‘장애인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네 배우가 풀어내는 형식이다. 단원 7명 중 유일한 비장애인인 강예슬씨는 “관객들이 공연을 보면 장애인도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아빠이자 엄마, 그리고 남자이자 여자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면서 “앞으로 무대에 올릴 작품들을 통해 장애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 발전하길 바란다”고 했다.

김경하 기자

주선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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