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0일(월)

“저 이제 달라질 거예요” 연극이 끝나고 아이들은 다짐했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연극치료
자살 고위험군 대상으로 자존감 회복 캠프 마련
미리 정해놓은 대본 없이 참가자에 내용 맞춰 연기
“연극으로 나를 돌아봤다” 밥 먹듯 가출 일삼던 아이 대학 가겠다며 공부 시작

“작년 연극치료 캠프에 참여했던 한 아이가 있었어요. 중학교 3학년이었는데, 소위 학교 ‘짱’인 아이였죠. 학교에서 밥 먹듯이 폭력을 휘둘렀고, 가출해 여자친구와 동거까지 하더군요. 캠프를 마치면 3일 후에 보호관찰소를 퇴소하는 아이였어요. 아이는 연극 캠프에서 여러 체험을 했어요. 아버지와 만나 얘기할 수 있는 시간도 만들어줬죠. 캠프 내내 아이는 스스로 ‘달라져야겠다’고 말하더군요. 캠프가 끝나고 얼마 후에 아이는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시작했다고 전화를 걸어왔어요.”(박미리 ㈔한국연극치료협회 회장)

무대예술의 한 분야인 ‘연극’이 상처받은 청소년들의 치료제가 됐다.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은 지난 14일부터 16일까지 경기도 용인대에서 제6회 청소년 연극치료캠프 〈화·이·트; 화려한 이벤트〉를 열었다. 서울·경기 전역에서 모인 15~19세 ‘자살 고위험군’ 청소년 70여명에게 연극치료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도록 돕는 것이 목표다. 치료사 및 치료사에 준하는 자격을 가진 자원봉사자 60명이 일대일이 되어 2박3일 동안 밀착 워크숍을 펼치고, 마지막 날엔 참가자들이 준비한 연극을 공연하는 프로그램이다.

캠프 폐회식에 앞서 거행된 연극발표 무대. 모든 참가자들은 진지한 자세로 자신을 표현해내려 애썼다.
캠프 폐회식에 앞서 거행된 연극발표 무대. 모든 참가자들은 진지한 자세로 자신을 표현해내려 애썼다.

첫날엔 단체 놀이와 연극관람 등을 통해 ‘관계 형성’ 작업을 하고, 이 과정에서 6개의 조가 만들어졌다. 조희진 ㈔한국연극치료협회 교사는 “처음에는 ‘나는 아무 문제가 없어’ ‘그냥 놀러 왔어’라는 자세를 보이는 친구들도 많다”며 “스스로 문제를 모르고 있거나, 알고 있어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했다. 쉼터 출신의 한 참가자는 “연극이 유치하다고 생각했고, 주말도 끼어 있어 오고 싶지 않았다”고 했다.

둘째 날부터 본격적인 ‘연극치료’가 시작됐다. ‘남이 돼보는’ 연극의 속성을 통해 ‘나를 발견하는 것’이 기본원리다. 15일, 용인대 문화예술대학 8층 무용과홀에서 진행된 역할극에선 표현에 서툰 아이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뭐? 네가 심리치료사가 되겠다고? 네 성적에?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진학상담교사로 분한 연극치료 교사의 다그침에 아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정봉은 상무는 “캠프를 통해 얻은 내면의 새로움을 항상 간직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정봉은 상무는 “캠프를 통해 얻은 내면의 새로움을 항상 간직하길 바란다”고 소감을 밝혔다.

“왜 심리치료사가 되고 싶은데? 말을 해 보라고!”

교사의 계속되는 다그침에 아이는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정말 심리치료사가 진짜 되고 싶니?” “네….” “그러면 그 이유를 차근차근 얘기해 보자.”

교사들은 역할극에 맞춰 아이를 채근하기도, 다독이기도 하면서 아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도록 했다. 역할극에 참여한 한 교사는 “자신 안에 있던 문제를 스스로 발견해내는 것은 변화의 시작이 되는 것으로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안진수(17·가명)군은 “부모·친구들과의 갈등으로 힘들었는데, 역할극이나 상황극 등의 체험을 통해 다른 이가 아니라 내가 변해야 문제를 더 쉽게 헤쳐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조희진 교사는 “청소년들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데, 몸의 움직임과 타인의 관찰을 통해 이를 발견하는 것이 연극치료의 매력”이라고 했다.

캠프 마지막 날, 모든 참가자가 용인대 문화예술대학 5층 소극장에 모였다.

“지긋지긋해! 제발 내 몸에서 떨어져!”

긴 헝겊을 칭칭 감은 아이는 이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9명의 아이는 힘겨운 걸음걸이를 이어가며 “너 없이 살 거야” “이제 피하지 않을 거야!” “잘 가…” 하고 외쳤다. 6조가 보여준 연극 ‘신데렐라 런웨이’였다. 아이들이 두른 헝겊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을 의미했다. 한 조가 끝날 때마다 뜨거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박미리 협회장은 “연극을 위해 정해놓은 대본이나 커리큘럼은 없다”며 “모인 아이들의 상황이나 상처의 성질에 맞춰 내용을 구성한 이야기”라고 했다.

학교나 상담센터의 권유로 끌려오다시피 한 아이들이라 캠프 초기에 흡연을 자유롭게 못 한다는 이유로 반발이 일어나는 등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캠프가 끝날 무렵 아이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문희윤(14·가명)양은 “예전에 힘들었던 것이나 후회했던 일들을 생각하면서 나를 되돌아봤다”며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이 꺼려져 오기 싫었는데, 하다 보니까 속도 후련해지고 너무 재밌어서 3일이 짧다고 느껴졌다”고 했다. 박미리 협회장은 “청소년은 죽음의 충동이 가장 심하지만, 그 충동을 삶의 의지로 바꾸기도 가장 쉬운 집단”이라며 “캠프를 통해 아이들에게 생긴 ‘점’ 같은 변화가 ‘선’이 되고, 그 선이 아이들을 지탱하는 ‘동아줄’이 되어줄 것”이라고 했다.

정봉은 생명보험사회공헌재단 상무는 “작년 처음 연극치료캠프를 열었는데, 아이들의 열정적인 모습에 감탄했다”며 “이번 2박3일의 경험을 통해 모든 참가자가 내면의 아픔을 털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당당하게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용인=최태욱 기자

정소희 인턴기자

김명수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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