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토)

꿈은 크지만 희망 찾기 어려워… 우산이 필요한 조손가정 아이들

내년 1월에 지원비 끊겨 생활비 부족 등 어렵지만 꿈 키우며 잘 커준 남매
동생 대학 보내고 싶어 취업 준비 한창인 장호군
“어른이 되면 받은 만큼 베푸는 사람 되고 싶어요”

“저를 따라오세요. 조금 걸으셔야 해요.”
일러준 주소만으로는 집을 찾기 어려웠다. 연락을 받고 나온 장호(17·가명)는 산 쪽으로 몸을 돌렸다. 좁고 가파른 길을 한참이나 오른다.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었네”라는 기자의 말에 수줍은 듯 웃음을 지어 보인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장호(17·가명)군은 “나중에 돈을 벌어서 평평한 곳에 집을 마련해 두 분을 모시고 싶고, ‘사장님’이 되어 이웃과 사회에 많이 베풀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장호(17·가명)군은 “나중에 돈을 벌어서 평평한 곳에 집을 마련해 두 분을 모시고 싶고, ‘사장님’이 되어 이웃과 사회에 많이 베풀고 싶다”고 말했다.

조그만 철제문을 열자 어두컴컴한 마당 겸 욕실에는 잡동사니부터 눈에 들어온다. 세탁기, 프로판 가스통, 대중목욕탕에서 봄 직한 플라스틱 의자, 철제 대야와 뭉뚝해진 비누,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 재래식 화장실, 두 개뿐인 방의 벽지에는 곰팡이가 아무렇게나 슬어 있다. 장호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함께 방 하나를 쓰고, 책상이 있는 작은 방은 여동생 지수(16·가명)양에게 양보했다. 그나마 이 집도 무허가 건물이다.

장호군은 조손 가정이다. 부모님은 지난 98년 이혼과 함께 자취를 감췄다. 장호군과 여동생을 월세 방 주인에게 맡긴 채였다. 부모와의 연락이 끊기자, 월세 방 주인은 외할머니에게 연락했다. 한걸음에 서울로 올라온 외할머니 이순덕(64)씨는 “서너 살짜리 애들을 어떻게 복지시설로 보낼 수 있겠느냐”며 아이들을 경남 진주로 데리고 왔다. 이씨는 남매를 키우기 위해 시장에서 리어카를 끌며 과일 장사를 시작했다. 새벽 6시에 나가 밤 11시에 들어오는 생활은 13년간 이어졌다. 외할아버지는 고령과 건강 악화로 일을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때까지 “부모님이 없다는 것을 크게 실감하진 못했다”는 아이들은 중학교에 올라가 다른 동네 친구들을 만나면서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중학교 1학년 때 있었던 부모님 참관수업. 선생님은 지수양에게 “너는 할머니가 일하시니까 안 오셔도 된다”고 했다. 지수양은 “종례 시간이 끝나자 애들이 잔뜩 몰려와서 ‘너 엄마 없느냐’고 하더라고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한 세대를 건너뛴 차이가 남매를 힘들게 하기도 했다.

아이들은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저녁 6시 이후에는 밖에 나가지 못했다. 너무 엄하기만 한 할아버지 때문이다. 장호는 “큰 스트레스가 됐고, ‘부모님이 계셨다면’이란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유행에 민감한 여학생인 지수양은 더하다. “교복 치마를 한 번도 무릎 위까지 올려본 적도 없고, 짧은 치마는 한 번도 입어본 적도 없다”며 “친구들 유행도 못 따라가는 게 많이 속상했다”고 털어놨다. 가끔 배달 음식을 시켜먹거나 밖에서 간단한 외식을 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김은정 경상남도가정위탁지원센터 소장은 “할머니, 할아버지 손에 자라는 아이들은 세대 차이나 의사소통의 어려움 등으로 탈선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어려움을 겪었지만 지금 이 남매는 할머니에게 짐이 아닌 자랑거리다. 장호군은 학교(진주기계공업고등학교)에서 전교 10등 안에 들 정도로 모범생이다. 올해에만 교내 영어경시대회 대상, 교내 통일 안보 글짓기 최우수상, 교내 독서퀴즈 대회 최우수상을 받았다. 장호군은 “대회에 나가 상을 받으면 할머니, 할아버지가 좋아해서 기분도 좋지만, 문제집을 살 수 있는 문화상품권을 얻을 수 있어서 책값을 덜기 위해서라도 꼭 대회에 출전한다”고 했다.

인문계 고교에서 반 2등을 하는 지수양도 마찬가지다. 공부만 잘하는 것이 아니다. 재래식 화장실과 곰팡이 든 방에 살지만 “이렇게 함께 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할 정도로 어른스럽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자랑할 일을 많이 만들어 드리고 싶어 상을 받으려고 노력한다”는 말에는 지극한 효심도 느껴진다. 최승은 사회복지사는 “조손 가정 사례를 보면, 대부분의 할머니가 애들 때문에 힘들어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학교를 자퇴하는 등 엇나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 남매는 정말 잘 자랐다”며 “극히 드문 경우”라고 말했다.

장호 가족이 욕실 겸 다용도실로 사용하는 공간.
장호 가족이 욕실 겸 다용도실로 사용하는 공간.

지난 14일, 진주시 초전동 진주의료원 옆 도로에서 일요일 특근으로 도로 잡초 제거를 하고 있는 할머니 이순덕씨는 기자를 보자마자 아이들 자랑부터 했다. “우리 애들 정말 착하죠.” 이씨는 과일 장사를 접고, 현재는 시청 일자리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알음알음으로 소개를 받아 얻은 자리다. 3월부터 10월까지 도로에 꽃을 심거나 잡초를 제거하는 일을 한다. 현재 정부로부터 기초생활보장 수급비와 양육 보조금 등을 합쳐 월 84만원을 지원받지만, 고교생 2명이 있는 4인 가족의 생활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지난 9월부터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으로부터 생활비와 학습비를 지원받고 있는데, 이마저도 내년 1월이면 끊긴다.

이씨는 “공공근로는 1년에 8개월만 할 수 있기 때문에, 특근이 있으면 주말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든다”며 “일요일 온종일 일하면 5만원을 벌 수 있다”고 했다. 이씨는 이어 “다달이 40만원씩 적금을 넣고, 두 아이의 학원비도 내야 하기 때문에 악착같이 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허리가 아파 입원 중인 할아버지의 병원비도 할머니 몫이다. “힘들지 않으냐”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재밌다”는 것. “우리 아이들…. 저렇게 밝게 크는 것 보면 너무 즐겁고 재밌어요.”

장호군은 3학년이 되는 내년이면 취업을 할 계획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대학 진학을 권유하지만, 장호군은 완강하다. 애초에 스스로 공고를 선택한 이유도 빨리 취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1학년 때 이미 컴퓨터나 밀링(Milling·공작물을 절삭하는 가공법) 자격증을 따며 차근차근 준비도 해왔다. 대기업 취업을 위해선 영어가 중요하다는 말에, 최근에는 토익 공부에 한창이다. 응시료가 비싸 교내에서 실시하는 모의시험으로 실력을 다듬고 있다.

장호군이 취업만을 생각하는 이유는 간호사가 꿈인 여동생 지수양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다. “선생님들한테 들었는데, 대기업에서 3년을 일하면 2년제 대학을 거의 무료로 다닐 수 있고, 5년이 넘으면 4년제도 다닐 수 있대요. 일단 제가 돈을 벌어 지수를 대학 졸업시킨 후, 저는 나중에 기업에서 돈을 받아서 대학에 다닐 거예요.”

오빠의 희생과 배려 덕분에 지수양은 꿈에 더 집중하고 있다. 이제 1학년이지만, 간호학과 입학에 가산점을 주는 요양원 봉사도 꾸준히 다니고 있다. 지수양은 “열심히 준비해서 우리 때문에 늙으신 할아버지, 할머니를 잘 보살펴 드리는 훌륭한 간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다.

동생을 대학에 보내는 것이 목표라는 장호군. 그가 갖고 있는 꿈은 뭘까.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나가라고 하면 나가야 하는 무허가 건물인데, 가파른 언덕에 있어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힘들어하세요. 위험하기도 하고요. 돈을 벌어서 평평한 곳에 집을 마련해 두 분을 모시고 싶어요. 최종적인 꿈이요? 저도 ‘사장님’이 한번 돼보고 싶습니다. 사장이라는 호칭에는 많이 베풀 수 있는 여유와 능력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많은 도움을 받고 살았으니, 많이 베풀 수 있는 사장님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할머니, 할아버지도 잘 건사하고, 이웃과 사회에 좋은 일도 많이 할 겁니다.”

●꿈나무 후원문의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희망나눔센터

전화: 1588-1940

홈페이지: www.childfund.or.kr

페이스북: www.facebook.com/childfundkor

트위터: @childfundkorea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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