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금)

[Cover Story] ‘자립의 날개’ 달아주는 학교… 세상을 향해 飛上

미국 발달장애 직업교육 체험한 ‘장애청년드림팀’
발달장애 청년 8인 선진 문화 체험 시카고행
미국 PACE 학생 2년간 청소부터 월급관리까지
혼자 생활하는 법 배워 25년간 85% 높은 취업률
주변의 도움만 바랐는데 미국 친구와 함께해 보니 홀로 살아볼 용기 생겨요

그렌브룩스고등학교 학생식당 요리사 조쉬씨와 장애청년드림팀이 함께 포즈를 취했다.
그렌브룩스고등학교 학생식당 요리사 조쉬씨와 장애청년드림팀이 함께 포즈를 취했다.

“Lots of work! Lots of fun!(일은 많지만, 너무 재미있어요!)”

파란 눈에 금발머리를 한 29살 조쉬(Josh·학습장애)씨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8명의 한국 발달장애청년들이 그의 주위를 둥그렇게 에워싸며 질문을 쏟아냈다. 조쉬씨는 어깨에 두른 초록색 앞치마를 만지작거리며 또박또박 답변을 해나갔다. 그는 그렌브룩노스고등학교(Glenbrook North Highschool) 학생 식당에서 5년째 요리사로 일하고 있다. 요리를 좋아하지만 언어 이해 능력이 떨어지는 자폐성 장애 때문에, 식당일은 꿈도 못 꾸던 조쉬였다. 그러나 지금은 일주일에 3일, 하루 6시간씩 일하면서 시간당 9달러(최저임금은 7.25달러)를 버는 어엿한 요리사다.

그를 고용한 알폰소(Alfonso·46)씨는 조쉬씨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내셔널루이스대학(NLU)의 페이스(이하 PACE) 프로그램을 통해 조쉬씨를 처음 만났습니다. 인턴십을 하는 1년 동안 성실하게, 또 맛있게 요리를 만드는 걸 보고 채용했는데 매우 만족스러워요.” 조쉬씨를 따라 조리기구도 만져보고, 음료수와 샌드위치들을 보기 좋게 진열하던 이시훈(24·지적장애1급)씨는 “나도 좋아하는 직업을 찾고 싶다”며 눈을 반짝였다.

지난 8월 23일, 장애청년드림팀 최초로 한국 발달장애청년들이 시카고를 찾았다. 9박 11일 동안 진행된 이번 연수에서 청년들은 미국의 선진 발달장애문화를 경험하고 돌아왔다.
지난 8월 23일, 장애청년드림팀 최초로 한국 발달장애청년들이 시카고를 찾았다. 9박 11일 동안 진행된 이번 연수에서 청년들은 미국의 선진 발달장애문화를 경험하고 돌아왔다.

지난 8월 27일, 미국 일리노이주의 그렌브룩노스고등학교에서 진행된 ‘일일직원’ 체험 현장. 한국 발달장애청년 8명의 꿈을 찾는 도전이 시카고에서 시작됐다. 이들은 대구대학교가 지난해 3월 평생교육원 산하에 설치한 발달장애인 고등교육기관(3년 과정), ‘케이페이스(이하 K-PACE)’의 2학년생들이다. K-PACE는 미국 내셔널루이스대학(NLU)이 1986년, 발달장애 학생들을 위해 개발한 PACE 프로그램을 국내 최초로 도입한 모델이다. K-PACE는 발달장애 학생들이 직업을 갖고 자립할 수 있도록, 금전관리·생활기술 등 직업탐색 교육과 인턴십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9월부터 우체국·법원·대구 엑스코·병원 등에서 외부 인턴십을 진행할 예정이에요.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일을 하게 될 학생들에게 ‘나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고 싶었어요. K-PACE의 모태가 된 미국 PACE 학생들을 만나서 그들이 어떻게 자립에 성공했는지 직접 보고, 느끼고, 배우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죠.” 김금숙 대구대 K-PACE 교수가 ‘장애청년드림팀’에 지원한 동기를 설명했다. ‘장애청년드림팀’은 꿈을 가진 장애 청년들이 국제사회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한국장애인재활협회와 신한금융그룹이 지원하는 해외 연수 프로그램이다. 8기에 선발된 K-PACE 학생들은 9박 11일 동안 발달장애와 관련된 미국의 선진 직업 문화를 체험하고 돌아왔다. K-PACE의 김금숙, 박세진 교수가 이들과 동행했다.

◇’자립생활(Independent Living)’로 발달장애청년 취업률 늘려

미국 시카고 북쪽에 위치한 도시, 에반스톤(Evanston). 미시간 호수를 끼고 차로 10분쯤 달리자 나무 사이로 늘어선 5층짜리 옅은 갈색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건물 입구에서 만난 21살 에릭(Elic·학습장애)씨가 우리를 2층으로 안내했다. “오른쪽이 세탁실, 왼쪽이 부엌, 그리고 여기가 제 방이에요.” PACE를 졸업하고 가구회사에 취직한 에릭씨는 친구와 함께 30평 남짓한 아파트에서 자취 생활을 하고 있다. 빨래, 청소, 요리 등 모든 집안 살림도 직접 한다. PACE에서 직업교육을 담당하는 로빈(Robin Sowl)씨가 PACE의 중요한 원칙을 설명했다.

“PACE 학생들은 정규 과정 2년 동안 기숙사 생활을 합니다. 부모로부터 떨어져 혼자 생활하는 법을 배우고, 단체생활을 하면서 사회성을 기르죠. 2년 훈련을 거치고 나면, PACE 졸업생의 80~90%가 에릭처럼 독립생활을 할 정도로 성장합니다.”

PACE 졸업생들은 직장에서 받은 월급도 직접 관리한다. 집세를 내고, 장을 보고, 저축도 한다. 기숙사 생활을 하는 동안 훈련된 전문 생활지도사로부터 금전관리, 위생관리, 시간관리 등 체계적인 교육을 받은 덕분이다. 부모로부터 독립해 일상생활이 가능해지니, 직업 생활도 가능해졌다. 미국 장애인의 80%가 고용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PACE 졸업생의 85%가 직장을 찾았다. PACE는 이러한 체계적인 자립생활교육을 바탕으로, 지난 25년간 85%의 취업률을 계속 유지해왔다.

◇’특별’하지 않아도 ‘행복’한 직업을 찾는다

1980년대 초반, 일리노이주 스코키 지역 인근의 고등학교 교사들이 내셔널루이스대학(NLU)으로 몰려왔다. PACE가 설립되기 전, 대학 내에서 소규모로 직업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할 때의 일이다. 이들은 “갈 곳 없는 발달장애청년들이 많다”면서 직업 훈련 교육을 확대해줄 것을 부탁했다. 장애 정도가 심한 청년은 병원에서 치료를 받거나 보호작업장에서 일을 할 수 있지만,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선 상에 있는 발달장애 청년들이 문제였다. 대학에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고, 직업도 갖지 못한다. PACE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 “초기엔 특별하고 어려운 직업 위주로 찾아봤어요. 발달장애 청년들도 일반인처럼 직업의 제한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캐롤(Carol Burns) PACE 소장이 입을 열었다. “의욕이 앞서다 보니 학생들이 원하는 직업이 무엇이고,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잊어버리고 있었어요. 해답은 바로 학생들에게 있었는데 말이죠.” 첫해엔 2가지 직종에서 인턴십을, 2년차 땐 하나의 직업을 경험하게 한다. 졸업 후 전환교육 과정 1년 동안은 실제로 급여를 받으며 직장 생활을 한다. 캐롤(Carol Burns) 소장은 “학생이 행복한 직업을 찾아야 고용주의 만족도가 높다”며 관련 에피소드를 소개했다.

“길 찾기를 좋아하던 마이클에게 GPS 회사 인턴십을 연결했어요. 공사 중인 골목을 찾아서 보고하는 일을 했는데, 항상 정확하게 길을 찾아와서 직원들 모두 깜짝 놀랐다고 해요. 마이클은 인턴십 3개월 만에 월급을 받고 정식으로 일하게 됐습니다.”

◇똑똑한 네트워킹 전략으로 고용 시장 틈새 뚫어

발달장애청년들이 원하는 직업을 찾아주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직종 발굴이 필요하다. PACE에서 직업개발을 맞고 있는 바바라(Barbara Kite) 디렉터는 “‘네트워킹 전략’이 중요하다”고 귀띔했다. PACE는 인턴십 과정에 있는 학생 1~3명당 직업 코치를 붙여서, 이들의 원활한 업무 진행을 돕는다. 현장에 나간 직업 코치에게는 또 하나의 역할이 주어진다. 고용주와 기관장을 만나 네트워크를 쌓는 일이다. 바바라씨는 “기관마다 하루에 한 명씩 네트워킹만 전담하는 직업 코치를 따로 둔다”면서 “학생들에게 더 적합한 업무가 무엇일지 기관 관계자들과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좋은 일이 있으면 선물을 통해 감사 인사를 전한다”고 설명했다. 상호 피드백 속에서 학생들의 직업 능력도 향상되기 시작했다. 성과가 나타나자 인턴십으로 만난 학생들을 정식으로 채용하는 기관이 늘어났다. 신뢰가 쌓이니 새로운 직업도 개발됐다. PACE와 파트너십을 맺은 기관들이 발달장애청년들이 일하기 좋은 기업, 기관들을 지속적으로 소개해줬다. 실제로 시카고의 러쉬대학병원에서 만난 원장은 미국 연방정부의 각 부처 관계자들을 한자리에 불러 PACE가 그들의 교육 프로그램을 프레젠테이션하고 소개하는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11일에 걸친 장애청년드림팀 해외 연수가 끝날 때쯤, 미국 PACE 학생들과 만난 한국 발달장애청년들에게도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번 학기부터 법원에서 사무보조 인턴십을 시작하는 오영휘(22·자폐성장애3급)씨는 “장애인은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고 잘못 생각해왔다”면서 “나도 PACE 친구들처럼 부지런하고 적극적으로 일해야겠다”는 다짐을 보였다. 학생들을 오랜 기간 지켜봐 온 박세진 K-PACE 교수도 이들의 변화에 놀랐다.

“사실 이번 연수를 앞두고 ‘안된다’, ‘불가능하다’는 걱정과 우려가 많았습니다.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장애청년드림팀’이 처음인 데다가, 사고가 날 수 있어서 위험하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PACE친구들을 만난 학생들이 ‘나도 엄마랑 떨어져서 혼자 살아보고 싶다’며 ‘자립 의지’를 보일 때, 정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금숙 교수도 같은 생각이다.

“장애는 ‘불편’일뿐, ‘불가능’이 아닙니다. 한국에도 PACE처럼 발달장애청년들의 자립에 관심을 갖고 응원해주는 이들이 많아지길 바랍니다.”

시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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