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금)

오랜만의 병실 밖 나들이에… 아이들은 활짝, 부모들은 뭉클

소아암 환아들의 특별한 출사

언니, 저기 화단에 있는 꽃도 찍어보자.

그림자가 지니까 반대편에서 찍어봐.

새하얀 마스크를 쓴 민경(가명·12)이가 진지한 얼굴로 미러리스 카메라를 들었다. 옆에 선 언니 진경(가명·15)이도 화단 앞에 알록달록 핀 나팔꽃과 국화꽃을 향해 연신 셔터를 눌렀다. 민경이는 2년 전 갑작스럽게 소아암 판정을 받았다. 병동에서 지낸 지 1년여, 이제는 바깥출입도 가능해졌다. 따스한 10월의 햇살 아래, 자매는 연신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올림푸스한국 ‘아이엠카메라 희망여행’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 한 환아. ⓒ장은주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지난 21일 일요일, 인천 중구 해안동 차이나타운 옆에 있는 복합 문화예술 공간 인천아트플랫폼. 19세기 근대 문화의 정취가 보존된 이곳에 소아암 환아 16명이 특별한 야외 ‘출사’를 나왔다. 이들은 네 곳 병원(가천대길병원, 국립암센터,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인하대병원)의 환아들. 지난 두 달간 올림푸스한국의 ‘아이엠카메라(I am Camera)’ 수업을 통해 카메라 작동법과 사진을 공부했다.

아이엠카메라는 카메라·의료기기 기업인 올림푸스한국의 사회공헌 프로그램이다. 짧게는 2~3년, 길게는 10년까지 병동에서 지내는 소아암 환아들을 위해 병동으로 찾아가는 카메라와 사진 교육을 제공한다. 2015년부터 17병원 170여 환아가 혜택을 받았다. 이번 출사는 ‘아이엠카메라 희망여행(이하 희망여행)’이란 이름으로 기획됐다. 아이들이 병동을 벗어나 그간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고, 가족과의 추억을 쌓도록 하기 위해서다. 지난해 강원도 횡성으로 떠난 첫 여행에 이어, 올해는 소아암 환아와 가족, 올림푸스한국 임직원 자원봉사자 등 90여 명이 참여해 인천 나들이를 왔다.

올해 희망여행은 2박 3일간 도시 탐방부터 아티스트 워크숍, 가족 관계 강화 프로그램 등으로 구성됐다. 둘째 날인 이날은 예술가들과 함께하는 ‘아티스트 워크숍’ 시간. 진경·민경 자매가 속한 ‘국립암센터’ 조는 예술가 이화진·한석경(미술 그룹 ‘이룹빠!’)씨의 인솔에 따라 인천아트플랫폼 인근 탐방에 나섰다. 주제는 ‘보이지 않는 도시를 찾는 방법’. 도시에서 각자가 관찰한 것을 사진과 소리로 담는 작업이었다. 같은 시간 다른 조들도 ‘장판 롤플레잉 게임’ ‘놀이 설명서 만들기’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했다.

소아암 환아 태형(가명·16)이가 카메라에 열중하고 있다.ⓒ인천=장은주 C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아이들은 선생님의 인솔에 따라 관광객들이 가득 찬 거리 곳곳을 카메라와 녹음 장비를 들고 누볐다. “이렇게 사람 많은 곳에 처음 와 보는데 진짜 좋아요.” 연신 길옆의 나무와 하늘을 찍던 태형(가명·16)이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태형이는 “사진을 3년 정도 찍었는데 풍경 사진을 가장 좋아한다”며 휴대폰을 꺼내 직접 찍은 사진들을 보여줬다. 수준급 실력이었다. 몸 상태가 나빠 여름 내내 집에만 있었던 지희(가명·15)도 신이 났다. “카메라가 재밌어졌어요. 요즘엔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 아빠랑 수목원에 가서 사진을 찍고 와요.”

아이들이 사진 삼매경에 빠져 있던 시간, 인천아트플랫폼 내 한국근대문학관에는 환아들의 부모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암 생존자의 사회복귀를 주제로 한 부모간담회가 열린 것. 부모들은 서로 소통하며 ‘무료 가발 지원’ ‘소아 암 경험자 수시 특별 전형’ 등 필요한 정보도 얻었다. 동병상련하는 시간. 현장은 금세 눈물바다가 됐다. 진경·민경 자매의 엄마인 조영신(가명·44)씨는 “부모들끼리 서로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 아니까 짠해서 계속 눈물이 났다”며 “건강이나 비용 걱정에 여행도 잘 못 갔는데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걸 보니 기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작년부터 희망여행에서 소아암 환아 부모들을 만나 온 김현진 국립암센터 의료사회복지사는 “병동에 있으면 병 호전도가 비교되다 보니 모두 온종일 커튼을 닫아두고 소통을 안 한다”면서 “부모들이 서로 아픈 부분을 꺼내 놓고 나눌 수 있는 이런 시간이 정말 중요하다”고 말했다.

올해‘아이엠카메라 희망여행’에 참가한 소아암 환아와 그 가정, 봉사자들. ⓒ올림푸스한국

올해로 4년 차, 아이엠카메라는 소아암 환아와 가족들이 세상과 만나는 ‘창’이 되고 있다. 캠페인을 기획하고 직접 사진 교육 강사로도 참여 중인 고은혜 올림푸스한국 CSR팀장은 “아이의 변화를 부모와 주치의,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먼저 느끼면서 다른 병원에서도 ‘우리도 수업해달라’는 연락이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조혜영 올림푸스한국 커뮤니케이션그룹장은 “의료기술의 발전으로 소아암의 생존율은 80% 이상으로 상승했다”며 “앞으로 암 생존자가 당당히 사회로 복귀하도록 돕는 프로그램을 지속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희망여행을 통해 탄생한 아이들 작품은 오는 12월 17일부터 30일까지 인천 복합 문화 공간 트라이보울에서 전시될 예정이다.

 

[인천=박혜연 더나은미래 기자 hone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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