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일)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고통받는 여성… “당신은 혼자가 아니에요”

위기임신여성 위해 만든 ‘여성소망센터’
한동대 로스쿨 학생들 힘 모아 포항에 ‘여성소망센터’ 설립
미국·캐나다의 지원 체계 분석해 상담에서 자립까지 돕는 5단계 지원모델 자체 개발
“위기에 처한 임신 여성 위해 체계적인 지원으로 그들 도울 것”

미상_그래픽_위기임신여성_손_2012지난 2003년, 대학생이던 김미라(가명·31)씨는 임신진단시약에 나타난 두 줄을 확인하고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몇 번이고 눈을 비벼봐도, 결과는 같았다. 예기치 않은 임신에 미라씨는 덜컥 겁이 났다. 스무살을 갓 넘은 나이, 당시 그녀가 생각한 유일한 선택은 임신중절수술이었다. 부모님께 알리지도 못하고 남자친구와 수술 비용을 마련하던 미라씨는 가장 친한 친구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당시 한동대에 다니던 친구는 대학 교목실 목사 사모이던 황민정(35) 소장에게 미라씨와의 상담을 요청했고, 황 소장은 또 다른 대안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고민 끝에 미라씨는 아기의 생명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황 소장은 그녀가 임신기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와 여건을 마련해주고, 출산 후에도 든든한 멘토로 인연을 계속하고 있다. 미라씨는 “아기의 생명을 통해 제게 새로운 길이 열렸다”고 담담히 고백한다. 9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초등학생 딸을 가진 어엿한 어머니이자 학원 강사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이 사건을 통해 황 소장은 “예기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이하 위기임신여성)들에게 다양한 선택이 가능함을 전해야겠다”고 결심했고, 이들에게 법률 상담 등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위해 2008년 진학한 한동대 로스쿨에서 든든한 지원군을 얻었다. 계기는 로스쿨에서 진행된 ‘Doing Justice(사회적 정의 실천)’라는 실무 수업이었다. 한 학기 동안 포항 지역 내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이를 직접 실행해보는 수업이었다. 당시 황 소장과 함께 팀을 꾸린 학생들은 위기임신여성과 미혼모를 위한 상담 프로그램을 발표했고, 이는 직접 비영리단체를 설립하는 기획팀으로 발전했다. 다른 팀에 속한 학생들도 이들의 발표를 듣고 “참여하고 싶다”고 마음을 움직였다. 학생들의 적극적인 활동을 보고 한동대 영어학과 교수, 상담학부 교수 등 전문 교수들도 뜻을 모았다.

여성소망센터는 한동대 로스쿨을 졸업한 황민정 소장(왼쪽에서 세번째) 외 8명과 한동대 영어교수, 상담학부 교수 등 이사진 3명이 힘을 합해 지난 2010년 가을 문을 열었다.
여성소망센터는 한동대 로스쿨을 졸업한 황민정 소장(왼쪽에서 세번째) 외 8명과 한동대 영어교수, 상담학부 교수 등 이사진 3명이 힘을 합해 지난 2010년 가을 문을 열었다.

그렇게 2010년 가을, 위기임신여성과 미혼모를 위한 지원단체인 ‘여성소망센터’가 설립됐다. 9명의 실무진이 모두 한동대 로스쿨 졸업생이다. 여성소망센터 실무자 김나래 변호사(31)는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그가 또 다른 친구들에게 뜻을 전하면서 자연스럽게 여성소망센터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졸업 후 변호사로서 법률 전문가로 활동할 수도 있지만, 자신들의 재능을 공익적인 가치를 실현하는 데 뜻을 가진 분들이 많았다”고 전했다.

이들은 학교에서 보여줄 수 없었던 다양한 재능을 여성소망센터에 나누기 시작했다. 디자인에 남다른 소질이 있던 변호사는 여성소망센터 로고를 제작했고, 평소 사진 찍는 걸 좋아하던 학생은 홍보물을 제작했다. 컴퓨터를 잘하는 변호사는 SNS를 통해 아기용품을 기부받는 소셜 플랫폼 개발에 들어갔다.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딴 이들은 위기임신여성을 지원하는 하트비트 국제단체(Heartbeat International Organization)에 여성소망센터를 한국지부로 등록한 뒤, 센터의 방향을 설정하고 관련 매뉴얼과 노하우를 전수받았다.

미국 전역에는 약 3000개의 위기임신상담센터가 상담과 출산, 육아를 연결하는 체계적인 지원 체계를 갖추고 운영되고 있다. 이 때문에 미국·캐나다 여성 대부분이 위기임신상담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해 본 경험이 있을 정도로 센터 참여가 보편화돼 있다고 한다. 실제로 미국 위기임신상담센터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이희영 변호사(30)는 전국에 있는 국내 상담센터를 방문한 뒤, 상담 봉사자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총 25명의 봉사자가 현재 센터에서 교육을 받고 있다. 포항 지역에 다문화 여성이 많은 점을 고려해 중국·러시아·우즈베키스탄·미국 등 다양한 언어로 상담이 가능한 봉사자도 8명도 확보했다.

아기옷, 장난감, 가정용품들을 담는 여성소망센터 바구니. /여성소망센터 제공
아기옷, 장난감, 가정용품들을 담는 여성소망센터 바구니. /여성소망센터 제공

2010년 10월, 기본 세팅이 마무리되자 여성소망센터는 세미나, 기부가게 등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포항의 한 여성병원의 도움으로 세미나실을 확보한 여성소망센터는 지난해 11월부터 한 달에 두 번, ‘여성들이여, 당신의 몸을 알라’ ‘남편이 코치하는 브래들리 출산 방법’ ‘성(性), 연애, 출산에 대한 여성들의 고민’ 등 다양한 주제로 ‘소망 세미나’를 열고 있다. 출산 경험이 있는 신생아 전문 간호사, 미국 변호사, 영어 교수 등이 강사진이다. 세미나에 참여한 여성들은 여성소망센터에서 만든 가상 화폐단위인 ‘아기 원’ 포인트를 얻는다. 태어난 아기가 있거나 임신한 친구를 강의에 데려올 경우 15원, 출생 전 산부인과 진료 상담시 25원, 세미나 참석시 100원 등 포인트 획득 방법도 다양하다.

이러한 교육 활동은 기부가게 ‘소망의 나무(Tree of Hope Shop)’로 연결된다. ‘아기 원’ 포인트를 받은 여성들은 기부가게에서 새것이거나 깨끗하게 사용된 유아용품, 임산부용품 및 기본 가정용품을 구매할 수 있다. 아기 옷 한 벌에 25원이니, ‘소망 세미나’ 한 번 참석으로 아기 옷 네 벌을 살 수 있다. 지역 주민들의 도움과 SNS를 통해 수백 벌의 아기 옷과 장난감, 유모차, 아기 침대, 신발 등을 마련할 수 있었다. 장소는 포항시청이 지원했다. 덕분에 별도의 비용 없이 시청 내 일부 공간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아기를 낳기로 결정한 여성들이 출산할 때까지 지낼 수 있는 시설도 건립 중이다. 지인의 도움으로 안동의 한 지역에 200평 규모의 땅도 마련했다. 이들이 자립할 능력을 키울 때까지 아기와 함께 거주할 수 있는 임시거주시설과 미혼모 여성이 바리스타로 일할 수 있는 ‘키즈카페(Kids Cafe)’도 마련할 계획이다. 그렇게 되면 ‘상담-교육-나눔-출산-자립’으로 이어지는 여성소망센터의 ‘5단계 위기임신여성 지원 모델’이 완성된다.

황 소장은 마지막으로 예기치 않은 임신과 출산으로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남겼다. “당신은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당신을 위해 여기 있습니다. 우리는 아기를 사랑하지만, 엄마를 더 사랑합니다. 당신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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