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일)

당신의 라이프스타일을 책임집니다, 단 공정하게!

페어트레이드코리아 그루(g:ru)

황금빛 오일이 여성들의 삶을 바꿨다. 모로코 남서부 아가디르에서 남쪽으로 12km 떨어진 티라니민 지역, 척박한 사막지대에 산으로 둘러쌓인 이 곳에선 농사도 불가능했다. 일자리는 없고, 사람들은 가난했다. 2007년, ‘글자 공부’를 하러 모인 22명의 여성이 중심이 되어 협동조합을 꾸렸다. 모로코의 ‘공정무역 아르간 오일 생산조합’, 티라니민(Tighanimine) 조합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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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라니민(Tighanimine) 조합 생산자 여성들이 아르간 열매 껍질을 손으로 벗기는 모습. 대대로 물려온 전통, 친환경 방식으로 오일을 추출한다. /티라니민 조합 제공

건조한 사막땅에도 야생 아르간 나무는 지천에 가득했다. 전 세계 유일하게 이 지역에서만 자란다. 수백 년간, 이 지역 여성들은 나무 열매에서 짠 오일을 피부에도 바르고 약으로도 썼다. 티라니민 조합에서는, 대대손손 물려오던 친환경 전통 방식 그대로 열매를 채취하고 오일을 생산한다. 생산하는 오일은 유기농 인증에 공정무역 인증까지 받았다. 프랑스, 스페인, 미국, 이탈리아, 일본 등 거래하는 국가도 하나 둘 늘었다. ‘감히 여자가 나서서 돈을 번다’며 반대하던 지역 남자들도 늘어나는 소득 앞에 조금씩 태도가 달라졌다. 이제는 참여하는 지역 여성만도 60명 이상. 들어온 수입으로는 아이들도 교육시키고 집안 살림도 챙긴다. 함께 모여 글도 배우고 교육도 듣는, 지역 공동체의 ‘중심’이 됐다.

“아르간 오일이 유명세를 타면서 많은 화장품 제조업체에서 모로코에 들어왔어요. 그런데 과도하게 열매를 채취해 아르간 숲이 사라지거나, 오일 판매금에 비해 일하는 사람들은 쥐꼬리만한 돈을 받는 경우도 비일비재해요. 그런데 ‘공정무역’은 매 단계마다 일의 양에 비례해 적정한 돈을 받습니다. 조합 전체에서 남은 소득은 조합원들과 배분하고요. 여성이 소득을 얻으면 아이들이 달라지고, 집안이 달라지고, 지역 사회가 달라집니다. 저는 거기에 미래가 있다고 봐요.” (나디아 파트미(Nadia Fatmi) 티라니민 조합 대표)

◇먹고 입는 것 넘어… 좋은 원료·정직한 가격, ‘공정무역 화장품’

‘소비자에겐 건강한 피부를. 여성 생산자에겐 좋은 일자리를’

모로코 여성들의 삶을 바꾼 티라니민 조합의 아르간 오일이 한국 소비자들과도 만나게 됐다. 공정무역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페어트레이드코리아 그루(g:ru)를 통해서다. 피부에도 좋으면서 ‘공정하게’ 거래되는 원료는 없을까, 여기저기 수소문하던 이미영 페어트레이드코리아 대표(사진)에게 모로코의 ‘아르간 오일’이 눈에 들어왔다. 모로코 티라미닌 생산조합을 알게 된 것도 이때다.

그러나 좋은 원료가 있다고 좋은 화장품이 뚝딱 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국내 바이오테크 기업과 손을 잡고, 수개월에 걸쳐 실험과 임상테스트를 진행했다. 아르간 오일에 ‘발효 기술’이 더해지고, 그 밖에 차차 수급한 유기농 원료들을 하나씩 집어넣으며 최종 출시까지 1년 6개월도 넘게 걸린 ‘야심작’이 나왔다. 2015년, 더페어트레이드코리아에서 출시한 아르간 라인 제품은 총 4가지. 평균 90% 이상 유기농 성분으로만 이뤄졌다.

박창현 사진작가 촬영
박창현 사진작가 촬영

“원료 들여와서 화장품 제형 뽑는데만 1년도 더 걸렸어요. 원료값이 많이 들었죠(웃음). 화학성분을 넣지 않으니 기본 단가도 높고요. 그래도 처음부터 ‘어디 내놔도 자신있는 퀄리티’로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 함께 개발한 국내 기업이 워낙 기술도 뛰어나고 공정무역 가치를 잘 이해하셔서, 이런저런 실험이 가능했습니다.”

국내 최초, 100% 공정무역으로 수급한 유기농 원료로 만든 화장품. 시장 반응은 ‘뜨겁다’. ‘성분에 민감한’ 아토피나 악건성 고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퍼졌고, 한번 구매한 이들의 재구매율도 높다. 국내 고가의 수입 유기농 화장품에 비해 ‘가격도 합리적’이란 평이다. “다른 화장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원가가 비싼 제품”이지만, 유통 과정도 최소화하고 마진을 낮춘 것. 화장품이 출시된 해, 전체 매출을 끌어올리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한 1등 공신이다. 처음으로 ‘영업이익’도 발생했다.

“공정무역 샴푸도 막바지 테스트를 마치고 곧 출시될 예정이예요. 앞으로도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거나, 현지의 좋은 원료들을 베이스로 만든 화장품 라인을 계속 늘려갈 거예요. 네팔 산지에서 쓴다는 ‘치우리 버터’도 너무 원료가 좋아서, 화장품으로 개발이 가능할 지 테스트 중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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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간 오일을 베이스로 한 ‘그루 테라피(g:ru therapy)’ 공정무역 화장품 모습. 발효세럼에서부터 오일, 핸드크림에 이르기까지, 공정무역으로 수급한 원료들로 생산했다. /박창현 사진작가 촬영

◇9년, 사람과 사람을 잇다

공정무역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페어트레이드코리아의 시작은 ‘수공예’ 였다. ‘아시아의 수공예 생산자와, 한국의 소비자를 잇겠다는 것’. 2007년 5월, 페어트레이드코리아가 첫 걸음을 디뎠다. 이 대표는 “경실련 환경개발센터, 여성환경연대 등 환경 분야 시민단체의 활동이 환경과 여성, 빈곤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아시아 대부분의 빈곤층이 여성이예요. 그들 대부분이 수공업에 종사하고요. 이들이 친환경 재료를 활용해 전통 방식으로 만든 제품을 구입해서 생산자들에게는 더 나은 소득과 생계를 보장하고, 국내 소비자들에겐 좋은 제품을 매개로 윤리적 소비를 넓히는 것이 그루의 미션입니다.”

사리 원단을 '리사이클링'한 뒤, 손으로 자수를 박은 팔찌. 인도 콜카타 '사샤' 생산자 조합에서 만들었다. 그루의 인기 품목 중 하나다. /박창현 사진작가 촬영
사리 원단을 ‘리사이클링’한 뒤, 손으로 자수를 박은 팔찌. 인도 콜카타 ‘사샤’ 생산자 조합에서 만들었다. 그루의 인기 품목 중 하나다. /박창현 사진작가 촬영

시작한 지 올해로 9년, ‘더 많은 소비자에게 닿기 위해’ 제품은 점점 다양해졌다. 수공예 완제품 수입에서, 의류와 액세서리, 리빙제품, 지난해엔 화장품이 더해졌다. 현지에서 생산하는 소재와 직조 방식을 고려해 국내에서 디자인해 생산을 맡기기도 하고, 전통 방식으로 제조된 제품을 가져오거나 약간의 ‘변주’를 주문하기도 한다. 네팔, 인도, 방글라데시 등 함께 거래하는 생산 조합만도 총 4개 국가, 26개 생산조직에 달한다.

“옷이 제일 어려워요. 의복 문화가 다르니까 생산자 입장에선 상상하기가 힘든 거예요. 여자들이 약간 큼직하게 입는 오버사이즈(over-size) 디자인을 주문하면, 임산부 옷이라고 생각하거나, 한국 여자들이 보통 뚱뚱하고 덩치가 큰가 보다 하더라고요 (웃음). 제일 처음 겨울 의류 제작을 시도했을 때도 난리도 아니었어요. 화학성분 소재를 쓰지 않다보니 코트나 패딩 만들 소재를 찾을 때도 한참 고민이었어요. 그러다 솜을 누비고 재봉으로 마감하는 ‘솜패딩’을 하기로 했는데, 패딩을 입어본 적 없는 생산자들이 솜을 너무 빵빵 하게 넣어서 울트라 공룡 같은 옷들이 도착한 거죠. 그 밖에도 시행착오나 소통에서 매번 쉽지 않았죠.”

9년의 시간, 이제는 26개 생산조합 모두가 “생사고락을 함께 넘어 온 동지”다. 쌓인 시간 만큼, 가정사나 집안 대소사도 오며 가며 소식 주고 받는 사이가 됐다. 생산조직마다 특성을 살려 분업도 이뤄지도록 했다. 한 곳에선 자수 제품만 생산하고, 다른 곳에선 의류에 집중하게 하는 식. 생산자의 전문성을 키우면서, 디자인이나 기능, 마감 등 제품의 질을 더욱 업그레이드 하기 위함이다. 눈에 띄는 변화도 많다. 

“지난 7월, 출장 때 방문했던 한 네팔 생산조직은 청각장애인을 우선적으로 고용하는 곳이에요. 그때 만난 한 생산자 분은, 이곳에서 재단사로 일하시면서 언니랑 아들까지 부양할 정도가 됐다면서 고마워 하세요. 그런데 귀가 안 들리니까 손으로 소통하면서 물건을 만드시더라고요. 개발도상국에서 장애인을 위한 인프라가 굉장히 부족하고 사회적 편견도 심한데, 공동체 안에서 일자리도 얻고, 상처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공간을 갖게 되신 것 같아, 우리 일이 참 의미 있다고 느꼈죠.” (전지윤 페어트레이드코리아 무역팀)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손맛 나는 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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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트레이드코리아 그루의 의류라인 제품들. 다양한 천연 소재에 각기 다른 직조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디자인부터 소재를 만들고 마감하기까지, 1년 가까운 기간이 걸린다. /박창현 사진작가 촬영

제품 하나, 소재 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긴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패스트 패션’과 달리, 생산자들이 한 땀 한 땀 소재에서부터 공들여 만드는 ‘슬로우 패션’의 묘미다. 옷을 디자인해서 주문, 제작하는 데까지 대략 1년을 잡는다. 내년도 봄·여름 시즌 제품을 올해 봄부터 준비하는 셈. 느리지만, 건강하고 단단한 소재에 한 땀 한 땀 애정을 들여 옷으로 만들어지는데 필요한 시간이다.

“네팔에는 사나아스타카라는 생산조직이 있거든요. 뚫린 도로가 없어 8시간 걸어야 도착하는 곳이에요. 거기서는 전통적으로 알로(nettle)라는, 쐐기풀 일종인 식물을 가지고 실을 뽑아요. 야생의 가시 달린 쐐기풀을 꺾어서 말렸다가, 물에 불렸다 다시 말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섬유질을 추출해 내요. 그럼 그게 강아지풀 같은 모양이 되는데, 마을 여자들이 모여서 수다를 떨면서 털을 꼬는 거예요. 그 실로 직조한 제품은 말 그대로 100% 핸드메이드죠.” (이미영 대표)

인도 여성들이 입는 사리를 재활용해, 여덟 겹을 손으로 한 땀씩 누빈 업사이클링 담요나, 나무에 문양을 새긴 블록을 만들어 문양 하나, 하나를 찍어 무늬를 입히고 색을 더하는 인도의 다부 프린팅 방식, 베틀 직조로 옷을 생산하는 네팔 생산조합 등 소재부터 직조 방식까지, 매장에 전시된 모든 제품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품었다.

◇진정한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로 거듭나기까지

구매자의 ‘소비’로 세상을 바꾼다는 공정무역. 남아있는 과제는 어떤 게 있을까. 이 대표는 “아직 국내에선 ‘윤리적 소비’ 시장이 팍팍한 편”이라면서도 “공정무역 업계에 다양한 주체들이 진입하고 있어 긍정적으로 본다”고 했다. ‘공정무역’에 관심을 갖는 시나 구가 늘어나는 것도 반가운 변화다. 2016년 9월, 서울 성북구에 ‘페어라운드(Fair Round)’ 공정무역 공간이 문을 열었다. 성북구가 갖고 있던 자투리 땅에 2층짜리 아담한 건물이 들어섰다. 그루에서 공간 운영을 도맡았다. 1층은 ‘공정무역’을 매개로 요리나 공예, 공정무역 강좌 등 여러 강의가 이뤄지고 2층은 그루를 비롯해 다양한 공정무역 제품들로 꾸며졌다. 영화상영이나 커피 드립 강좌 등 다양한 문화 코드로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가면서도 좋은 가치를 지닌 제품들과의 ‘접점’이 되도록 한 것.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페어라운드'. 2층 매장에는 다양한 공정무역 기업들의 상품이 전시되어 있다. 성신여대입구역에서 5분거리. /박창현 사진작가 촬영
서울시 성북구에 위치한 ‘페어라운드’. 2층 매장에는 다양한 공정무역 기업들의 상품이 전시되어 있다. 성신여대입구 역에서 5분거리. /박창현 사진작가 촬영

시작한 지 올해로 9년, 페어트레이드코리아 그루에서 앞으로 그리는 그림은 뭘까. 이 대표는 “느리지만 성장을 멈추지 않고 더 매력적인 브랜드로 거듭날 것”이라고 했다. 

“공정무역은 기본적으로 ‘슬로우 비즈니스’잖아요. 관계 맺고 소통하고 하면서 천천히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앞으로는 ‘라이프스타일 브랜드’라는 설명에 걸맞게 완성도 높은 제품들을 더 많이 선보일 거예요. 기존 ‘그루’와는 타겟 대상이 다른 독립 브랜드도 시작할 계획이 있고요. 더 매력적이고 좋은 제품들로 소비자들의 공정한 ‘라이프스타일’을 책임지는 브랜드가 되는 게 목표입니다.”

*본 기사는 서울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디지털마케팅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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