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8일(수)

“뒤늦게나마 사회에 내 능력 환원할 수 있어 기쁩니다”

시니어 봉사자

오랜만에 봄날다운 포근한 날씨를 보이던 지난 13일, 인사동의 한 찻집에 어르신 네 사람이 모였다. 보건직 공무원으로 청춘을 바쳤던 이상수(63)씨, 고등학교 과학교사로 시작해 35년간 교직에 몸담았던 이영출(66)씨, 간호사가 된 지 40년이 다 된 신정숙(61)씨, 독일에 있는 한국학교 전체를 관장했던 교육외교 공무원 출신 박종화(66)씨다. 얼핏 공통점이 전혀 없어 보이는 네 사람의 인생사를 들어보면 한 가지 접점이 있다. 바로 ‘시니어 봉사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은퇴 후에도 자신이 가진 전문성을 살려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봉사활동을 하며 ‘제2의 인생’을 꾸려가고 있었다.

동그랗게 둘러앉은 4명의 어르신 중 유일한 여성인 신정숙씨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시니어 봉사자는 내가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요.”

인사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신정숙, 이영출, 이상수, 박종화(왼쪽부터)씨가 모여 봉사활동을 하며 느끼는 ‘나눔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인사동의 한 전통찻집에서 신정숙, 이영출, 이상수, 박종화(왼쪽부터)씨가 모여 봉사활동을 하며 느끼는 ‘나눔의 기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간호사였던 그는 현직에 있을 때부터 봉사활동을 활발히 하다가 퇴직 후 여러 단체에서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나서게 됐다. 의료 봉사활동 기회가 많았던 신씨지만 은퇴 이후에는 의료와는 관계없는 봉사활동을 하고 싶었다. 사람과 직접적으로 부딪히는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가 상당했기 때문이다. 퇴직 후 한 종교 단체에서 설거지 봉사를 제일 먼저 시작했다.

그러나 생각만큼 만족감이 크지는 않았다. 신씨는 “그 경험을 통해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해야 봉사하는 나도, 봉사 받는 사람도 더 만족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서울형 데이케어센터에서 치매노인을 돌보거나 종교단체 산하 복지원에 있는 환자들을 돌보는 등 여러 가지 의료 관련 시니어 봉사를 하고 있다. 신씨는 “30년 넘게 간호사 생활을 했는데 이제서야 ‘진짜 간호사’가 된 것 같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환자의 휠체어를 밀 때도, 약을 먹일 때도 ‘이 사람은 나 아니면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드니 돈을 받고 일할 때보다 더 강한 사명감이 든다는 것이었다.

시니어 봉사자들의 이런 연륜과 사명감은 젊은 봉사자들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내는 원동력이 된다.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 쌓았던 인맥도 좋은 자원이 된다. 충남에서 오랫동안 보건직 공무원 생활을 했던 이상수씨는 ‘돈도 부족하고 사람도 부족한’ 라오스에서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기생충 퇴치사업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이씨는 “내가 담당했던 2개 마을 주민의 92.8%가 기생충에 감염됐었다”라며 2004년 라오스 도착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한국 정부에서 주는 사업비만으로는 기생충 퇴치 활동을 완벽하게 할 수 없었다. 이씨는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생각에 자신이 일했던 충남도청에 SOS를 요청했다. 충남도청에서는 그를 믿고 약을 무료로 지원해줬고, 이씨는 이런 성과를 인정받아 2009년 대한민국 해외봉사상 대통령상을 받았다. 이씨는 “라오스의 보건 의료 상황이 내가 처음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던 1960년대 중반의 한국과 비슷해서 더 잘 대처할 수 있었던 것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영출씨는 시니어 봉사단으로서 자원봉사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도왔던 곳을 위해 모금활동에까지 나섰다. 35년간 경북 영주에서 중고등학교 아이들을 가르치고 교장까지 했던 경험을 살려 태국 북부 람빵 중고등학교에서 2년간 봉사활동을 했던 이씨는 한국에 돌아와 가족, 친지, 지인들을 대상으로 후원금을 모았다. 그 결과 자신이 봉사를 했던 태국 중고등학교 학생들에게 400만 원의 장학금을 전달할 수 있었다. 이씨는 “작년 12월 20일에 학생 23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하고 왔다”며 “앞으로도 기회가 된다면 계속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시니어 봉사자 가운데는 직업과 관련된 전문지식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특기를 발휘해서 자원봉사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박종화씨 역시 자신의 뛰어난 어학재능을 발휘해서 통역 봉사를 하고 있다. 박씨는 서울의 한 여고에서 영어교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해 1991년에 장학사가 됐다. 당시 보기 드문 독일어 전공자에 영어 능통자였던 그는 독일에 있는 한국학교 전체를 관리하는 교육 담당 영사로 10년간 독일 본에 체류했다. 2008년 은퇴를 하고 나서는 G20 등 여러 국제회의에서 통역 봉사를 시작했다. 작년부터는 서울시 시니어전문자원봉사단의 단장을 맡게 됐다. 박씨는 “처음으로 한국을 여행하는 외국인, 부모를 찾으러 온 해외입양인 등의 통역을 하다 보면 말 한마디로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라며 “이 맛에 봉사한다”라고 말했다.

네 명의 시니어 봉사자들은 하나같이 “내가 가진 능력을 뒤늦게나마 사회에 환원할 수 있어서 기쁘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세상 떠날 때는 재물, 능력 다 놓고 가야 하는데 죽을 때 후회하지 말고 사는 날까지 나눠야 하지 않겠느냐”며 웃음을 터뜨렸다.

서로의 다른 봉사활동 이야기로 세 시간가량 끊임없이 이어졌던 대화는 이영출씨와 이상수씨의 버스 시간이 다가오면서 아쉽게 접어야 했다. “앞으로 가끔 연락하자”며 명함을 주고받는 그들 사이엔 ‘나눔’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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