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6일(월)

“기부·봉사는 매일 해도 질리지 않아”… 10년 넘게 장기 후원 3인

‘더네이버스클럽’ 멤버들의 나눔 스토리
굿네이버스에 연간 1000만원 이상 후원… 해외 아동·청소년 100여 명에 기부·봉사

“가진 걸 조금 나눠준 것뿐인데, 기부를 통해 삶 전체의 활력을 얻는다.”

국제구호개발 NGO인 굿네이버스에 연간 1000만원 이상 후원하는 고액 기부자, 일명 ‘더네이버스클럽(the neighbors club)’의 일원인 김숙자(62·주부), 김진숙(55·경북대 교수), 방인옥(50·개인 사업자)씨가 한목소리로 말했다. 부자여서가 아니라, 10년 넘게 장기 후원하며 쌓아 올린 보람이었다.

지금까지 세 사람이 도운 해외 아동 및 청소년만 100여명, 국내에선 아동·북한 지원 등 전 분야에 도움의 손길을 뻗었다. 기부와 봉사를 병행했더니, 어느새 돈과는 바꿀 수 없는 개인만의 ‘나눔 스토리’가 생겼다는 세 사람. 지난달 28일, 29일에 걸쳐 굿네이버스 ‘더네이버스클럽’ 후원자들의 기부 이야기를 들어봤다.

더네이버스클럽

◇딸이 남긴 위대한 유산 ‘나눔’ 세상에 전하는 모정(母情)

“민정이가 남긴 가장 큰 유산이 ‘나눔’이죠.”

김숙자씨는 지난 2007년, 큰딸 고(故) 심민정씨의 이름으로 아프가니스탄 여대생들을 돕는 장학금을 만들었다. 결혼 자금으로 모아둔 3600여만원에 조의금 등을 보태 4000만원을 채워 내놓은 것. 계기를 묻자 자연스레 딸 이야기가 흘러나왔고, 눈물부터 흘렸다.

“워낙 ‘애어른’ 같았죠. 맏이라 그런가 어릴 때부터 남을 먼저 챙기면서 자랐어요. 언제나 야간 자율학습 마치고 혼자 뒷정리하느라 30분 늦게 나오던 애였죠. 대학에 가서는 청바지 하나 입고 다니면서도, 주말엔 아르바이트 대신 탈북자 아이들을 가르쳐주러 다니고.”

강원도 시골에서 학원 한 번 안 다니고 1등을 놓친 법이 없었고, 단번에 서울대에도 합격한 딸에게 부모는 족히 판검사는 되리라 기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민정씨는 2006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아프가니스탄 자원봉사를 결심했다. 김씨는 “딸이 ‘NGO에서 일하면 행복하겠다’ 하더라”고 회상했다. “이 분야에서 평생 일하려면 어려운 사람들의 삶 속에 들어가 그들을 온전히 이해하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해서 1년만 자원봉사를 다녀오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아프가니스탄의 굿네이버스 여성센터에서 봉사하던 민정씨는 풍토병인 A형 간염에 걸려 8개월 만에 급히 귀국, 동생으로부터 간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원망이나 후회는 없었냐”는 물음에 김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생사를 오가는 상황에서도 딸은 ‘제가 한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울지 말라’ 당부했죠.”

김씨는 딸을 보내고 이듬해 굿네이버스에 기부금을 전달, 아프가니스탄에 ‘심민정 장학금’을 만들었다. 이와 함께 정기 후원도 약정했다. “딸이 종종 메일을 보내 ‘아프가니스탄에서 일하면서 굿네이버스가 얼마나 좋은 일을 많이 하는지 알게 됐다’고 자랑했죠. 나도 후원자가 되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알려달라던 말이 아이를 떠나보내고 귓가에 계속 맴돌더라고요.”

어느새 나눔은 김씨 마음의 가장 큰 치료제가 돼주었다. 김씨는 “도움 받는 아프가니스탄 여대생들이 매년 고맙다는 편지를 보낸다”며 “일주일에 두 번 민정이가 일한 여성센터에 와서 봉사한다는데, 딸의 뜻이 그들을 통해서 이어지는구나 싶어 뿌듯하다”고 했다. 딸을 보내고 아들을 얻기도 했단다. 바로 굿네이버스 아프가니스탄 디렉터인 ‘나킵’이다. 그는 매년 한국을 방문해 김씨를 찾아온다. “민정이는 누워서도 여성센터를 걱정했다고 하더라고요. 한국인도 아프간을 그렇게 걱정하고 도움을 줬는데 자신이 고국을 위해 무엇을 못 하겠냐며, 딸의 뜻을 잊지 않고 이어가겠다는데 큰 위로가 되지요.” 해마다 딸을 위해 추모제를 지내며 기억해주는 굿네이버스도 고마운 존재다.

후원을 시작하고 알게 된 기쁨과 보람이 커, 김씨는 손수 후원을 독려하는 편지를 써서 주변을 설득했다. 그렇게 2008년부터 발굴한 후원자 수가 벌써 100여명이 넘는다.

김씨는 “딸의 숭고한 뜻이 이어져 나가는 모습을 볼 때면 딸이 살아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나눔의 끈을 놓을 수 없다”고 한다. 언젠가 딸을 만나면 ‘자랑스러운 엄마’가 되고 싶다는 그녀는 올해 딸이 세상을 떠난 10주기를 맞아 약 1000여 만원을 굿네이버스에 전달할 예정이다.

◇직접 본 현장 신뢰 나눔의 오랜 원동력

“현장이 10년 나눔의 원동력이 됐다.”

김진숙씨는 2007년 당시, 경북대 제자들에게 방학 기간 참여할 수 있는 해외 봉사를 소개하기 위해 현장 답사차 굿네이버스의 베트남 자원봉사 활동에 참여했다. 그 우연한 계기가 나눔에 눈을 뜨게 했다고 한다.

“‘암소 뱅크’라는 게 있더라고요. 가난한 농가에 무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암소를 살 수 있도록 하는 건데, 어떤 농가부터 혜택받을지 기존 마을회의에서 결정하도록 하더라고요. 주민들을 존중하며 자립하도록 돕는 방식을 보고 ‘이거다’ 싶어 한국에 오자마자 굿네이버스에 후원 신청을 했죠.”

신뢰는 고액 기부로 이어졌다. 2010년, 김씨는 저소득 가정 아동의 교육을 돕는 굿네이버스 희망나눔학교 사업에 써달라며 1억원을 쾌척했다. 10여년 넘게 모아온 돈이었다. “제자들이 저소득층 아이들의 멘토가 돼주고 다양한 문화 체험도 시켜주는 나눔 단체를 운영하는데, 스스로 돈을 벌어서 활동하더라고요. 어찌나 기특하던지. 스승으로서 저도 뭔가 해야지 싶었죠.”

‘기회가 생기면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기부하자’는 건 그녀의 인생 목표였다. 어려운 형편이었지만 끝까지 공부를 할 수 있던 건, 매해 꼭 한 분의 스승이 ‘지지자’ 역할을 해준 덕분이었다. 그 받은 사랑을 되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중고등학교 때는 형편이 더 어려운 친구들을 모아 방과 후 수업을 자처해 꾸렸고, 대학 땐 야학을 열심히 했다. 이후 정신없이 살다 보니 잊어버렸던 목표가, 제자들 덕분에 다시금 살아난 것이다. “마침 모아둔 돈이 있으니 이번엔 마음먹은 즉시 기부하자 싶었죠. 기부처는 고민도 안 했어요. 믿을 만한 곳에 맡기고 나니 오랜 숙제를 푼 듯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김씨는 굿네이버스 정기 후원과 고액 기부 이후 외에도 사비를 털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의 조력자로 나서고 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고의 나눔 교육법’이라는 그녀. “제자들도 감사하고 나눌 줄 아는 따뜻한 선생님들로 자라 나눔의 선순환이 일어났으면 하는 게 이제 새로 찾은 인생 목표입니다(웃음).”

◇매해 참여하는 봉사 나눔 물론 젊음 유지의 ‘비결’

방인옥씨는 소문난 ‘봉사왕’이다. 2007년부터 굿네이버스에서 매해 국내외 봉사 활동을 다니고 있는 그는 처음 봉사를 시작할 당시, 이미 10여년간 정기 후원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동이체되다 보니 어느새 후원하는 마음을 잊고 기계적으로 돈만 나가고 있더라고요. 직접 만나고 몸을 써야 진짜 돕는 게 아닐까 생각했죠.”

무작정 굿네이버스 홈페이지에서 봉사 활동을 신청해 강원도에 있는 아동보호시설에 간 것이 첫발이었다. “서먹하던 아이들과도 반나절이면 친해지는 ‘숨은 재주’를 알게 됐죠. 나로 인해 아이들이 한순간이라도 ‘즐겁다’고 하면, 그게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기부만 할 때는 모르던 희열이죠.” 강원도는 물론 천안, 문산 등 전국 곳곳에서 봉사로 맺은 아이들과의 인연은 3년은 기본, 10여년도 넘게 이어지고 있다. “말이 없고 어둡던 아이들이 소소한 일상까지도 시시콜콜 털어놓는 변화를 보면 발품 판 보람이 있죠(웃음).” 매년 서너 차례 현장을 접하다 보니 보이지 않던 나눔 사각지대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게 눈에 밟혀 정기 후원 이외에 추가로 조금씩 보탠 돈이 어느새 2000만원을 훌쩍 넘는다.

해외 후원 아동도 50여명이나 생겼다. 방씨는 “해외 아동들을 보면 ‘한국이 아닌 개발도상국에서 태어났다면 내 모습일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며 “해외 후원은 나 자신을 돕는 것 같다”고 했다. 쉰이 넘은 나이, 봉사단에서 최고참을 도맡는다. 날이 갈수록 힘에 부치지만 해외 봉사는 두세 배 더 큰 보람이 있어 그만둘 수 없다고 한다. 방씨는 “같이 봉사 활동을 가는 젊은이들이 1년 동안 열심히 돈을 모으고, 휴가를 아껴 와서 몸도 안 사리고 땀을 뻘뻘 흘리며 봉사하는 모습을 보면 왜 요즘 청년들이 무기력하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웃었다.

방씨의 나눔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건 두 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용돈을 아껴 굿네이버스 후원에 동참하더니, 큰딸은 4년 전 사회생활을 시작하고서 해외 후원 아동을 두 명 더 늘리기도 했다. “무슨 기부 천사냐” 놀리던 지인들도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재작년부터 주변에서 후원하고 싶다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기부를 시작한 친구들이 ‘이 좋은 걸 왜 이제야 했나’ ‘추천할 때 진작 시작할 걸 괜히 고민했다’고 하면 가슴이 뭉클하죠. ‘지난 25년 기부해온 시간이 헛되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책임감도 남다르게 느껴진다는 그는 자신만의 나눔 철칙을 고수하는 ‘정공법’을 이어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오래 후원을 해오면서 ‘나눔은 쓰고 남는 걸로 하는 게 아니라 그 몫은 내 것이 아니다 생각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죠. 덕분에 2005년 사업을 시작한 후 어려울 때 사무실을 줄일지언정 후원금을 미룬 적은 없어요. 앞으로도 그 외고집을 이어나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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