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금)

‘보통 아빠’ 1만명… 하루 1분 투자로 ‘좋은 아빠’ 도전!

네이버 카페 ‘아빠학교’ 만나보니…
자녀 양육 정보 공유하는 ‘아빠학교’… 온라인 통해 5000가지 놀이법 공개
‘1분 놀이’ 등 자투리 시간 활용해 좋은 아빠 되기 위한 소통의 場 만들어

“어린 시절 집은 ‘군대’ 같았죠. 아버지는 곧 법이었고, 불호령이 떨어지면 온 가족이 벌벌 떨었어요. ‘커서 아버지처럼 되지 말아야지’했는데, 20년 뒤 저도 그 모습으로 아이를 키우고 있더라고요.”

아홉 살 외동딸을 둔 아버지 김현기(가명·43·서울 광진구)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이가 갓 돌을 지났을 무렵인 2011년 퇴근길에 갑자기 쓰러졌다. 뇌수종이었다. 그 후 세 번의 수술을 더했지만 뇌 손상으로 감정 조절이 안 되고 몸이 아프면서 사소한 일에도 소리 지르는 일들이 늘어갔다.

“‘언제 짜증 낼까’ ‘쓰러지면 어쩌나’ 온 집안이 제 눈치를 봤죠. 아이가 다섯 살 때 아빠를 보면 긴장해서 대소변을 못 가리는데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죠.”

아이와 친해지는 법을 절박하게 찾던 박씨가 발견한 건 ‘아빠학교’라는 네이버 커뮤니티 카페(cafe.naver.com/swdad)였다. “아이에게 잘못했다는 죄책감에 힘들고 괴로웠어요. 그때 다른 아빠들의 실수담을 보고 위로받기도 하고, 다른 아빠들의 모습을 하나둘 따라 해보면서 용기가 나더라고요.” 덕분에 아픈 뒤 몸이 불편해 엄두도 못 냈던 캠핑도 도전해봤다고 한다. “운전을 할 수 없어서 짐을 모두 짊어진 채 떠난 고된 길이었는데 아이가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여행 이후 아이가 항상 제 옆에서 꼭 붙어 잡니다.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웃음).”

권오진 아빠학교 교장은 “동네 한 바퀴 돌기 등 작은 놀이로도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권오진 ‘아빠학교’ 교장
권오진 아빠학교 교장은 “동네 한 바퀴 돌기 등 작은 놀이로도 훌륭한 아빠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 권오진 ‘아빠학교’ 교장

지난 4일 저녁 8시 김씨를 비롯해 서울·일산·세종시 등 전국 각지에서 아빠학교 회원 10여명이 퇴근 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에 있는 5평 남짓 원룸에 모였다. 일명 ‘아지트’로 통하는 아빠학교 사무실에서 모처럼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고 함께 고민을 나누기 위해서다. 한 사람씩 용기를 내 자신의 이야기를 마치면 함께 자리한 아빠들 모두 공감과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여섯 살, 네 살짜리 남매를 위해 지난해 9월부터 육아휴직 중이라는 아빠 박남억(42·경기도 광명)씨는 “막상 휴직하니 아빠가 돈 버는 일 말고 무슨 역할을 해야 할지,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할지 몰랐다”며 “4개월을 아이들과 씨름하며 ‘조울증’을 반복하다 지난 1월 카페에 가입했다”고 했다. “의지할 곳이 생기고서 양육의 ‘고립’에서 탈출한 느낌이에요. 육아는 ‘여자 몫’이라고 생각했는데, 자신감이 생기고 제 역할을 찾으니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바쁘고 힘든 일상에서 ‘1분 놀아주기’ 수십년

이런 아빠들의 변화 뒤엔 24년간 두 아이를 키운 독특한 놀이 방법을 전파하는 ‘아빠학교 교장’ 권오진(57)씨가 있다. ‘아빠학교’는 자녀 양육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는 아빠들의 커뮤니티로 2009년 4월 처음 출범했다. 유행에 휩쓸려 우후죽순으로 쏟아지는 ‘무늬만’ 아빠 교육이 아니다. 이달까지 만 7년 동안 카페를 통해 온·오프라인으로 활동한 누적 회원 수만 1만 5천여명 이상, 매달 활동하는 회원은 360여명에 달한다. 커뮤니티에 공개된 놀이법은 5000가지도 넘는다. 광고 대행사 대표로 밤낮없이 일해야 했던 권씨가 아이들과 놀아주기 위해 고안한 ‘자투리 시간’ 활용법이다.

2001년 권오진 ‘아빠학교’ 교장이 만든 가족답사모임 ‘아빠와 추억 만들기’는 생긴 지 4년 만에 참여자가 5000명에 달했다.
2001년 권오진 ‘아빠학교’ 교장이 만든 가족답사모임 ‘아빠와 추억 만들기’는 생긴 지 4년 만에 참여자가 5000명에 달했다./권오진 ‘아빠학교’ 교장

그가 개발한 놀이법의 가장 큰 특징은 ‘단순함’, 일명 ‘1분 놀이’다. 이날 저녁 모인 아빠들에게 권씨는 ‘바비큐 놀이’를 제안했다. 1.5L 페트병에 구멍 두 개를 뚫고 젓가락을 통과시켜 돌리기만 하면 끝. 바로 따라 할 수 있으니 듣는 아빠들도 부담이 없다.

잠자고 있는 아이 손 한 번 만져주고 출퇴근하는 ‘취침 놀이’, 하루 한 번 1분 전화하기 등이 대표적이다. 간단해도 규칙은 있다. “‘점심 메뉴’ ‘가장 친한 친구와 한 놀이’ 등 아이가 관심 가지는 부분에 대한 질문만 하고 딱 끊었죠. ‘엄마 말씀 잘 들어라’ 등 사족은 절대 붙이면 안 돼요. 그러면 수직 관계로 돌변해버리고, 아이가 입을 다물게 되죠.”

딸보다 두세 배 힘에 부친 아들을 키울 땐 일명 ‘셀프 놀이’를 개발했다. 아빠는 힘들지 않고 아이만 지치게 하는 꾀돌이 게임이다. ‘베개 왕복 달리기’ ‘두 아이 씨름 붙이기’ 등 아이들이 뛰어놀면 아빠는 큰 목소리와 추임새만 옆에서 넣어주면 되는 것들이다.

설명을 듣고 실망하는 이들도 있다. 권씨는 “대개 아빠들은 ‘놀이’라고 하면 시간을 내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해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크다”며 “쉽고 가볍게 할 수 있어야 아빠가 아이와 오래도록 관계의 끈을 이어갈 수 있다”고 조언했다.

1분씩 쌓인 효과는 컸다. 권씨 본인이 바로 산 증인. 권씨는 두 자녀와 유치원 때부터 지금까지 10여년 이상 매일 한 번 이상의 통화를 나눈다. 이젠 대학생이 된 두 아이가 먼저 습관처럼 전화로 안부를 묻는다. “아들이 중학생 때 ‘아빠가 항상 자기 마음에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덕분에 우리 가족은 사춘기도 모르고 중2병도 넘겼죠. 최근 50대 또래 친구들이 자녀와 남남처럼 지내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아이들과 언제나 소통 창구가 열려 있다는 게 참 다행이구나’ 새삼 깨달았죠.”

‘아빠와 추억 만들기’의 대표적 프로그램 ‘무인도 체험’은 13년 동안 꾸준히 진행됐다.
‘아빠와 추억 만들기’의 대표적 프로그램 ‘무인도 체험’은 13년 동안 꾸준히 진행됐다./권오진 ‘아빠학교’ 교장

◇MBC ‘아빠 어디가’ 원조 개발… 이젠 일상 속 쉬운 육아법 이을 후배 아빠 양성

자신이 개발한 놀이를 다른 아빠들과 나누기 시작한 것은 1996년부터였다. 당시 네 살이던 유치원생 딸아이에게 골목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어 또래 가족 한 팀과 주말마다 공원에서 뛰어놀던 것이 계기가 됐다. “‘쑥 캐서 떡 해먹기’ ‘감자 구워 먹기’ ‘물고기 잡기’ 등 매주 자연 속 소소한 재미가 컸죠.”

부모들 사이에서 소문이 나기 시작하면서 2001년부터 아예 가족답사모임인 ‘아빠와 추억 만들기’를 만들었다. 대규모 물총 놀이, 과자로 집짓기, 민족사관고등학교에 나무 심기 등 각종 아빠와 자녀 간 놀이 활동을 개발, 특히 방학 때마다 진행한 무인도 2박3일 체험은 매년 참가자가 몰렸고 13년간 이어졌다.

김수남(가명·49)씨는 9년 전 딸과 무인도에 간 경험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2년 반 동안 주말 부부로 지내면서 아내는 물론 딸과도 서먹해지고 집에서 뭔가 죄지은 느낌처럼 지냈죠. 그런데 아이와 무인도에 가서 같이 태풍을 겪고, 배고픔도 참아보면서 부녀지간이란 걸 새삼 깨달았죠. 그 맛에 2011년 다시 아들과 무인도 체험에 도전했죠.”

이 무인도 여행을 알게 된 MBC 김유곤 PD는 권씨를 직접 찾아 노하우를 배워 MBC 대표 육아 프로그램 ‘아빠 어디가’ 프로그램을 개설하기도 했다.

네이버 카페 ‘아빠학교’는 이달 개교 7주년을 맞았다. 권오진(첫째 줄 왼쪽에서 셋째)교장과 아빠 회원들.
네이버 카페 ‘아빠학교’는 이달 개교 7주년을 맞았다. 권오진(첫째 줄 왼쪽에서 셋째)교장과 아빠 회원들.

‘이런 ‘놀이’가 일상 속에서 매일 실천될 수는 없을까.’ 권씨는 고민 끝에 2009년 지금의 ‘아빠학교’라는 온라인 카페를 개설했다. ‘요리반’ ‘꿈점검표반’ ‘헌혈반’ 등 15개 이상의 각 반을 개설, 매달 한 번 이상 자신의 실천 사항을 올리고 댓글도 달면서 응원하는 방식이다. 반마다 반장 선거 등 아빠들부터 카페 내에서 놀이를 실천한다.

‘꿈점검표반’의 반장을 자처한 한남수(45·인천 마전동)씨는 “꿈점검표는 자녀의 나이 주기별로 한 달에 한 번 아이의 꿈에 대해 서로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질문지”라고 소개하며 “지난해 4월부터 매달 실천했더니 아이가 스스로 꿈에 대해 생각해보고, 대화거리가 끊이지 않아 이전보다 아이와 훨씬 가까워졌다”고 했다. “반장은 일종의 각 반 아빠들의 ‘러닝메이트’같은 존재예요. 가장 활발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다른 아빠들과 함께하자고 독려하고 칭찬을 해주는 역할이죠. 아빠들 기 살려 주다 보면 제가 가장 신이 나요.”

권씨는 “최근 아빠 육아 프로그램들이 생기고 아빠들이 양육에 두려움이 더 커졌다”고 일침했다.

“미디어에서 완벽한 아빠 양육 모습을 보고 시작도 하기 전부터 아빠들이 지레 겁을 먹어요. 하지만 1분의 놀이로도 아이와 가정이 변할 수 있습니다. 그걸 알려주기 위해 ‘아빠학교’를 이어갈 겁니다. 그게 선배 아빠로서의 제 역할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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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1호 2024.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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