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일)

“청각장애인과 비장애인 잇는 목소리 되어 드립니다”

‘107 손말이음센터’ 체험 르포
병원 예약, 구인 구직 등 다양하게 이용 하루 이용 건수 2000건 웃돌아

헤드셋을 끼고 긴장할 틈도 없이 금세 이용자의 문의가 들어왔다.모니터 중앙에 뜬 ‘받기’ 버튼을 누르자 채팅창에 이용자가 접속했다는 공지가 떴다.’엄마에게 전화.’ 전화번호와 함께 여섯 글자가 하얀 채팅창을 채웠다.”안녕하십니까.107 손말이음센터 중계사 오민아입니다.따님의 요청으로 대신 전화드렸습니다.지금부터 중계를 시작하겠습니다.” “엄마 어디고” 모니터 속 글자가 기자의 목소리를 통해 어머니에게 전달됐다.”응 시장에 왔다.” 어머니의 구수한 사투리는 다시 문자로 변환돼 딸에게 전달됐다.그렇게 서로 위치를 확인한 모녀는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연결을 마쳤다.

첫 중계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이용자가 접속했다.이번엔 구직 문의다.알려준 전화번호로 “지금부터 청각장애인분이 문자로 전하는 내용을 그대로 중계해드리겠다”고 하자, 상대방이 당황한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청각장애인인데 구직 가능한가요?”→”이쪽 분야에서 일해 보셨나요?”→”일을 잘할 수 있어요”→”잘할 수 있는 것보다 경험이 중요한데, 이쪽에서 일해본 적 있나요” ….

미상_사진_장애인_수화_2015

결국 상대방은 “이쪽으로 전화해보라”며 회사 사장의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잠시 후 연결된 사장과 통화. “구직 문의하시는 분이 청각장애인이어서 대신 전화드렸다”고 하자, 사장은 “뒈지려고”라며 욕설을 내뱉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지난 8일과 9일, 기자가 찾은 곳은 광화문 한국정보화진흥원 15층에 위치한 ‘107 손말이음센터’. 수화를 뜻하는 한글 ‘손말’과 양방향 소통을 지원한다는 의미에서 ‘이음’을 붙였다.전화 이용이 어려운 청각·언어장애인이 비장애인과 자유롭게 통화할 수 있도록 수화나 문자 내용을 실시간으로 중계한다. 2005년 11월 서비스를 시작한 이후 하루 평균 이용 건수가 2000건을 웃돈다. 365일 24시간 운영되는데, 병원 예약, 구인 구직, 금융 서비스, 가족과 통화 등 내용도 다양하다.

특히 새벽에는 119 등 긴급 문의가 많다. 한번은 산모가 청각장애인이었는데, 중계사의 도움으로 병원과 실시간 의사소통이 이루어져 무사히 출산한 경우도 있다.당시 영상 중계를 했던 강이슬 중계사는 “간혹 엄마와 아이가 함께 접속할 때가 있는데 아이가 커가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고 했다.

107 손말이음센터 중계사들이 영상중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습. /오민아 더나은미래 기자
107 손말이음센터 중계사들이 영상중계 서비스를 제공하는 모습. /오민아 더나은미래 기자

이런 서비스가 필요한 이유는 뭘까. 서영 손말이음센터장은 “청각장애인들에게는 모국어가 수화이지 한국어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중계사가 되기 위해서는 능수능란하게 수화를 구사하는 것은 물론, 장애인에 대한 이해도 갖춰야 한다. 8시간씩 꼬박 3일 동안 교육과 실무 테스트를 거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기자 또한 문자를 중계해주는 신입 중계사가 되기 위해, 보안 서약서에 서명한 후 이틀 동안 200쪽에 달하는 교재로 빡빡한 교육 일정을 거쳐야 했다.

이승열 교육팀장은 “수화는 우리말과 어순이 다르고 조사도 없다”며 “제대로 된 중계를 위해서는 상당한 전문성이 필요하다”고 했다.

서비스 업무의 특성상 어려움도 많다. 이현정(29) 부팀장은 “‘청각장애인 대신 전화드렸다’는 말을 하기 무섭게 한숨부터 푹 쉬는 분도 있다”며 “빨리 말하라고 윽박지르거나 아예 전화를 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현재 중계사 35명의 재직 기간은 평균 4년 이상으로 긴 편이다. 중계사들은 그 이유를 “보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청각장애인이 수화로 전달한 내용을 상대편에 음성으로 전달하고 음성은 다시 수화로 전달한다. /오민아 더나은미래 기자
청각장애인이 수화로 전달한 내용을 상대편에 음성으로 전달하고 음성은 다시 수화로 전달한다. /오민아 더나은미래 기자

“사소하지만 서로 마음을 주고받았던 대화가 기억에 가장 남아요. 어머니랑 청각장애인 딸의 통화였는데, 서로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에 뭉클하더라고요. 제 목소리로 두 사람을 이어준다는 게 정말 뿌듯했어요.”

양혜이(48) 중계사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작년 12월, 107손말이음센터 어플이 출시되면서, 청각장애인들의 서비스 접근성은 훨씬 더 좋아졌다. 컴퓨터, 영상전화기, 문자, 네이트온 등 다섯 채널에 이어 어플만 깔면 언제든지 통화가 가능해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함께 해온 ‘터줏대감’ 서영 센터장은 “실제 중계를 하면서 뿌듯함과 보람을 느꼈던 것은 거창한 사례가 아니었다”며 “스스로 음식 주문을 처음 했다며 행복하다던 이용자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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