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토)

여느 교실처럼 수업… 책상에 앉은 얼굴 ‘꿈 많은 10대’

미혼모 대안학교 가보니
일반교과 공부와 부모·적성 교육 병행… 과정 이수 후엔 다니던 학교 복학 가능

“좋은 게 없기는 뭐가 없어? 여기에서 배우다가 학교로 돌아갈 수 있는 게 난 부럽기만 한데….”

둘러 앉은 네 명 중,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소녀가 버럭 화를 냈다. 미혼모 대안교육 위탁교육 기관에서 배울 수 있어 좋은 게 뭐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소녀가 “없어요”라고 잘라 말한 뒤의 일이다. 순간 기자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다른 한 소녀는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욱 푹 숙였고, 좋은 게 없다고 답했던 소녀의 눈빛은 크게 흔들렸다.

미혼모 대안교육 장기 위탁교육 기관 ‘동방누리학교’의 수업 모습.
미혼모 대안교육 장기 위탁교육 기관 ‘동방누리학교’의 수업 모습.

지난 7월 4일, 경기도 평택시 소사동에 위치한 미혼모 대안교육 장기 위탁교육 기관 ‘동방누리학교’의 교육 현장을 찾았다. 1년 전인 2010년 7월 우리나라의 첫 미혼모 대안교육 장기 위탁교육 기관이 문을 열었고, 동방누리학교는 두 달 뒤인 9월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정식 인가를 받았다.

동방누리학교는 미혼모와 아기 등 50여 명이 생활하고 있는 미혼모자 시설 ‘에스더의 집’에서 설립했다. 2010년 1월부터, 학업을 중단한 미혼모 학생들을 위해 운영하던 ‘풀잎학교’가 그 전신이다. 풀잎학교는 지금과 같이 학력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기관은 아니었고, 검정고시를 위해 교육을 필요로 하는 미혼모 학생들을 지원하는 수준이었다. 지난해 여름부터 시작된 정부 차원의 지원과 정책 변화로 동방누리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정식 대안교육 장기위탁기관으로 출발했다.

동방누리학교의 수업은 국어·영어·수학·사회·과학 등의 일반교과 40%와 부모 교육, 직업 교육, 인문학 교육 등의 특별교과 60%로 구성된다. 일반 학교 교육과 동일한 과정인 일반교과 수업은 오후 4시부터 시작된다. 정식 교사 자격증을 가진 인근의 특수학교 선생님들이 해당 학교 일정을 소화한 후 동방누리학교에 와서 수업할 수 있는 시간이다. 뜻을 갖고 동참하는 이가 아니고서는 지원하기 어려운 적은 예산으로 교사를 채용해야 하기 때문에 별도로 교사를 확보하기란 쉽지 않다.

7월 4일은 일반교과 중 사회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첫째 시간이 끝나고 쉬는 시간 10분 사이, 수업에 참여한 네 명의 소녀들과 함께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두 명은 동방누리학교의 학생이고, 두 명은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로 8월 초에 있을 시험에 대비해 수업에 참여한 상태였다. “부럽다”며 자신보다 어린 학생들을 나무랐던 소녀는 18살로 이미 학교에서 자퇴한 상황이었다. 미혼모 대안교육 위탁교육 기관의 학생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기존 학교에 재학 중이어야만 하는데, 이런 제도가 있는 줄 몰라 원치 않는 임신 후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볼록한 배를 가려주는 책상 앞에 앉아 있으니, 하나 같이 앳된 얼굴들로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들이었다. 동방누리학교 두 학생들에게 꿈을 물으니 모두 “없다”고 대답했다. 뒤에 서 있던 대안교육 업무 담당자인 김민숙(40)씨가 “에이, 넌 손재주가 좋잖아. 전에 하고 싶다고 했던 거 말씀 드려봐”라고 거들었지만, 해당 학생은 조용히 입을 다물고 눈을 피할 뿐이었다.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오는 기자에게 김씨는 “워낙 여러 어른들한테 이미 상처받은 경험들이 있어서 처음 보는 사람한테는 경계심이 강하다”고 설명해 줬다.

쉬는 시간이 끝나고 5시 사회 담당 교사 권혁운(35) 씨가 들어서고 수업이 시작되자, 교실에서는 어색한 기운이 금방 사라지고 다시 여느 학교의 수업 시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돌아갔다. 선생님은 칠판에 글씨를 쓴 후 한 사람 한 사람 눈을 맞춰가며 내용을 설명하고, 학생들은 사회과부도에서 선생님이 말한 지역을 찾는 데 열심이었다. 수업이 끝날 즈음 아이들은 선생님에게 날이 더우니 함께 아이스크림을 사다 먹자며 친근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지금은 허물없는 선생님과 제자의 관계지만 권 교사도 처음에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남자들에 대한 부정적 기억 때문인지, 선생님이기는 하지만 남자인 나를 처음에는 불편해 하더라”고 회고하며, “그래서 선생님으로서의 역할뿐 아니라, 롤모델 될 수 있는 좋은 남성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낀다”고 권 교사가 말했다.

교육과학기술부학교문화과_그래픽_미혼모_위탁교육기관_2011동방누리학교와 같은 미혼모 대안교육 위탁교육 기관을 이용할 경우 입학생은 원적 교장이 인정한 졸업장을 수여받거나, 출산 후 원적 학교에 복학해 학업을 지속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 단 원적 학교장이 인정한 기간 동안 소정의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하며, 입학 대상은 초중등교육법이 적용되는 재학생만이 해당된다. 때문에 퇴학이나 휴학을 한 경우에는 복교 절차를 거쳐야만 한다.

동방누리학교에는 아직까지 졸업 자격을 받은 학생은 없으며, 원적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계속하는 몇몇 사례가 있다. 에스더의 집 신희숙(57) 원장은 “지난해 10월 전북 정읍에서 왔던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 출산 후 학교로 다시 돌아가 양육과 학업을 병행하고 있다”고 예를 들었다. 해당 학생은 여성긴급상담전화 1366을 통해 알게 됐다며, 학업을 계속하기 위해 동방누리학교가 있는 에스더의 집으로 입소하길 원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자살하고 아버지와도 떨어져 열악한 가정 환경에서 자란 학생은, 다행히 학교 담임선생님의 적극적인 지원과 양해로 자퇴를 하지 않고 동방누리학교에서 공부할 기회를 얻는 게 가능했다. 현재는 출산 후 학교로 돌아가, 향후 아기의 양육비를 벌기 위한 직업을 갖기 위해 학교 공부에 열심이다.

동방누리학교에 지급되는 정부 지원금은 전담자 1명과 일반교육 교사비로 전액 쓰이고 있다. 그 외 추가적으로 필요한 연 2000만원가량의 운영비는 민간 모금을 통해 충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2011년 7월 현재 교육과학기술부가 지정한 미혼모 대안교육 위탁교육 기관은 15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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