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금)

이색 3色 직업세계 탐방기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그들이 사는 세상’

11,440개. 우리나라에 있는 직업의 숫자다(2014년 말 기준, 한국직업사전). 13~29세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장 1순위는 국가기관이며, 그 뒤를 공기업과 대기업이 잇는다. 사상 최악의 실업난이 직업 상실의 시대를 만들었다. 대다수가 ‘헬조선’을 외치는 지금, 오히려 모두가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나선 청년들이 있다. 세상을 바꾸는 직업을 택한 청년들, ‘그들이 사는 세상’ 이야기를 담아봤다.

◇ 예술 생태계 개선을 지원하는 외식·문화기업, ‘키노빈스(KINOBEANS)’

'키노빈스'를 이끌어가는 이근욱 대표, 이병현 커뮤니케이션 총괄, 백경렬 테크니컬 엔지니어의 모습. ⓒ김리은 더나은미래 청년기자
‘키노빈스’를 이끌어가는 이근욱 대표, 이병현 커뮤니케이션 총괄, 백경렬 테크니컬 엔지니어의 모습. ⓒ김리은 더나은미래 청년기자

커피(Coffee), 음식(Food), 그리고 문화(Culture).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세 가지의 연결고리다. 마포구 신수동에 위치한 서강대학교 아루페관에는 ‘누구나 마음껏 마시고 먹고 노는’ 세상을 꿈꾸는 세 남자가 있다. 이근욱 대표(33), 이병현 커뮤니케이션 총괄(30), 그리고 백경렬 테크니컬 엔지니어(42)다. 예술 생태계 개선을 지원하는 특별한 기업 ‘키노빈스’는 이들의 손으로 굴러간다.

‘키노빈스’는 독일어로 ‘영화’를 뜻하는 키노(kino)와 커피콩을 의미하는 빈스(beans)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단어다. 커피로 얻은 수익의 10%를 영화 생태계 개선에 사용하는 수익 모델이 키노빈스의 출발점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세 사람의 꿈이 같았던 건 아니다. 이근욱 대표는 한때 배우를 꿈꿨고, 백경렬 엔지니어는 음반 회사부터 공사현장, 영화 음향까지 거치지 않은 일이 없다. 이병현 총괄은 유명 광고 회사에 합격한 상태였음에도, 하루 동안 고민을 마치고 키노빈스에 합류했다.

즐겁게 놀기 위해서는 먹고 마시는 것이 준비돼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키노빈스의 커피는 <매트릭스>로 유명한 워쇼스키 자매의 드라마 <센스8>의 한국 촬영분에 케이터링 업체로 지정되며 할리우드에서도 훌륭한 맛을 인정받았다. <스타워즈>, <어벤져스> 등 영화에서 이름을 따온 덮밥 ‘소타워즈’, ‘닭벤져스’ 등은 평일 점심에만 판매됨에도 하루에 100개 이상이 판매되는 인기 메뉴다.

키노빈스 심야영화 상영 모습 /키노빈스 제공
키노빈스 심야영화 상영 모습 /키노빈스 제공

이뿐만 아니다. 키노빈스는 정기적으로 ‘다양성 영화상영회’를 열어 소규모 영화를 지원하고, DMC단편영화페스티벌의 공동 주관사로서 아역배우 김수안·배우 박소담에게 공로상을 수여하는 등 영화 생태계 개선에 힘써왔다. 또한 ‘KINO FNL(Friday Night Live)’ 행사를 통해 관객을 모아 수익금 및 대관을 지원하는 등 신흥 예술인과 대학생 동아리를 위한 플랫폼을 만들어가고 있다. 최근 <쇼미더머니5>에 출연한 래퍼 면도, 연세대학교 버스킹 동아리 ‘무아’ 등도 이를 거쳐 갔다. “생각보다 무대가 필요한 예술인들이 많은데, 이들이 꿈을 잃지 않도록 여건을 제공하는 것이 키노빈스의 지향점”이라고 이병현 총괄은 설명했다. 이근욱 대표는 예술인을 꿈꾸던 과거에는 “허공에 붕 떠서 현실을 보지 못했다” 표현했다. 

“지금은 땅에 두 발을 디디고 하루하루 현실을 체감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가끔씩 점프는 해요. 키노빈스 바티칸점이 생긴다거나, 지금은 말도 안되는 망상을 해보는 거죠.”

백 엔지니어는 “망상이 아니다”라며 거들었다. “처음에는 키노빈스가 이 정도 자리 잡는 것도 저희에게는 상상하지 못할 일이었어요. 충분히 실현할 수 있는 일은 망상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망상 아닌 망상이 키노빈스를 이끈 원동력인 셈이다.

최근 키노빈스는 새로 들여온 믹서의 이름을 붙이기 위해 키니언(kinian, kino+ian)이라 불리는 손님들을 대상으로 공모전을 열었다. 믹서에는 ‘정말재믹서(정말재밌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병현 총괄은 믹서 이름처럼 모두에게 정말 재미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혼자만 잘 살면 재미없잖아요. 키노빈스는 항상 모두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모든 예술인들이, 더 나아가서는 모든 사람들이 즐거운 세상을 만들어갈 키노빈스의 변화와 도전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 세상을 바꾸는 이들의 뒤에서 세상을 바꾸다, 루트임팩트(Root Impact)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두 가지다. 세상을 직접 바꾸는 것, 그리고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이들을 도와 변화를 유도하는 것. 마치 뿌리(Root)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상을 바꾸려는 이들을 도와 사회 변화(Impact)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루트임팩트(Root Impact)의 이야기다.

루트임팩트 전경/ 루트임팩트 제공
루트임팩트 전경/ 루트임팩트 제공

루트임팩트는 사회적 기업 활동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비영리 사단법인이다. 혁신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바꾸려는 활동가들을 루트임팩트에서는 체인지메이커(changemaker)라 부른다. 체인지메이커들에게 교육과 커리어 개발의 기회를 제공(Learn팀)하고, 잠재적 체인지메이커들까지 아우르는 커뮤니티 형성을 지원하며(Inspire팀), 체인지메이커들이 협업하는 코워킹 스페이스 오픈을 준비(Work팀)하는 것이 루트임팩트의 주된 사업이다. 루트임팩트에서 인턴으로 시작해 뿌리내린 지 3개월 된 당찬 신입사원 김단비(25) 매니저는 공동주거공간 ‘디웰하우스(D-well house)’ 운영을 총괄하고 있다. 김 매니저는 “체인지메이커들의 커뮤니티 형성이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루트임팩트 김단비 매니저 /박창현 사진작가
루트임팩트 김단비 매니저 /박창현 사진작가

“저희는 디웰하우스를 통해 일종의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어요. 저마다 다양한 목적과 방향성을 가진 체인지메이커 분들이 함께한다면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양한 신념을 가진 체인지메이커들을 만날 때 저 역시 강력한 동기 부여가 됩니다. 얼마 전 있었던 디웰하우스 반상회 자리에서 입주민 분들을 만났어요. 처음 뵙는 자리였지만 본인들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한 신념이 굉장히 강하고, 에너지가 넘치는 분들이어서 깊은 영감을 받았어요.”

실제로 위안부 팔찌로 유명한 사회적 기업 마리몬드의 마케터, 점자 메시지를 새긴 디자인 소품 브랜드 도트윈(Dotween)의 공동대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회 변화를 꿈꾸는 체인지메이커들이 디웰하우스에 둥지를 틀고 있다.

김단비 매니저가 몸담고 있는 소셜 섹터(social sector)는 사실 대다수의 청년들에게 낯선 영역이다. 소셜섹터란 사회 문제를 해결하고 긍정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하는 분야를 말한다. 국내와 미국 등 다양한 비영리기관을 경험해온 그녀는 소셜 섹터에서 일하기 위해 필요한 가치로 타인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감’ 능력과, 추구하는 사회적 가치에 대한 ‘진정성’을 이야기했다.

“단기적인 성과나 경제적 이익보다는 장기적인 사회 변화를 꿈꾸면서 당장 많은 일을 해야 하다 보니, 진정성이 없이는 버티기 어려운 점이 있다고 봐요. 지금도 우리가 하는 일이 언젠가는 좋은 변화를 이끌 수 있다는 희망이 있어요. 그런 희망이 제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자, 주변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얻는 지지의 근원이에요.”

 

◇ 대화와 협력으로 만드는 신나는 상생, ‘신나는 조합’

“사진 찍을 줄 알았으면 좀 더 신경 써서 입고 올 걸 그랬어요.”
무더운 오후, 세 청년의 모습에서 답답한 양복과 빳빳한 넥타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캐주얼한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서로에게 농담을 서슴없이 건네는 모습에서 자유로운 분위기가 엿보였다. 우윤식 대리(31)와 정용기 주임(26), 그리고 강선균 주임(30)은 ‘신나는조합’에서 “말 그대로 ‘신나게’ 일하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신나는조합은 빈곤취약계층의 지속가능한 자활을 위해 설립된 국내 최초의 마이크로크레딧 전문사단법인이다. 마이크로크레딧은 대출이 어려운 절대빈곤층에게 소규모창업자금을 무담보로 지원하는 사업으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뱅크’로부터 출발했다. 2012년 협동조합기본법이 시행되면서, 신나는조합은 협동조합 설립 지원 및 교육 사업도 주관하고 있다. 세 사람은 협동조합 설립 상담 및 지원, 현장 모니터링 업무를 맡고 있다.

이들을 신나는조합으로 이끈 공통분모는 협동조합에 대한 관심이다. 소수가 아닌 다수가 주주로서 구매·생산·판매·소비를 협동으로 영위하고, 공동의 이익을 창출하는 협동조합의 구조가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정용기 주임은 “보다 많은 이들이 공존할 수 있는 대안적인 경제 체제인 협동조합에 관심을 갖고 입사하게 됐다”고 말했다. 강선균 주임의 경우, 어린 시절부터 시험 기간마다 문제 유형을 정리해 친구들에게 복사해주는 등 경쟁보다는 협력을 중시하며 자랐다고 회고했다. “무조건 돈을 버는 것보다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에서 큰 만족감을 느낍니다. 신나는조합의 일은 그런 제 가치관과 잘 맞는다고 생각해요.”

신나는 협동조합을 이끄는 우윤식 대리, 정용기 주임, 강선균 주임의 모습.
신나는 협동조합을 이끄는 우윤식 대리, 정용기 주임, 강선균 주임의 모습.

우윤식 대리는 협동조합에 대해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 표현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다섯 명이 모여서 협동조합을 이룬다고 해보죠. 한 사람의 욕심만을 내세워서는 협동조합이 성공할 수 없어요. 자연스럽게 토론과 대화를 거치게 되고, 그러다 보니 경제활동을 하는 과정에서 일상적인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습득하게 되죠.”

그는 협동조합을 교육하고 지원하는 기관답게, 신나는조합 역시 대화와 토론이 일상적이고 자유로운 문화를 갖고 있다는 자랑도 덧붙였다.

세 사람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사회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는 만족감이었다. 이들은 모두 협동조합을 통해 도움을 받는 이들에게서 감사 인사를 들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사실 돈만 본다면 회사를 위해서 일하는 일반 영리 회사가 더 나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저희는 기관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더 나아가서는 사회를 위해서 일하는 보람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강선균 주임의 말에 정용기 주임이 거들었다. “20년 가까이 교육받으며 들인 시간과 노력이, 단지 돈이라는 가치 하나만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아쉽잖아요.”

이들은 신나는조합과 같은 비영리섹터에 대한 잘못된 편견이 깨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취업에 실패해 어쩔 수 없이 이 분야를 선택하거나, 혹은 정치적 성향이 짙고 강경하다는 오해가 있다는 것이다. 우윤식 대리는 “돈이나 다른 기준보다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서 삶의 만족감을 얻는다는 점을 스스로 파악하고 선택했기 때문에, 이 영역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보다 주체적”이라고 강조했다. 강선균 대리 역시 “법 없이도 살 만한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며 웃었다.

“저희는 단지 다른 이들과 더불어 잘 살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을 뿐이에요. 행복해지는 방법은 생각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다른 청년들도 자신의 가치관을 잘 파악해 스스로 만족감을 찾을 수 있는 일을 선택하게 되길 바랍니다.”
  
김리은 더나은미래 청년기자(청세담 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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