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2일(금)

[한수정의 커피 한 잔] 일하는 사람들의 커피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사무처장

90년대 초반, 대학생 농촌활동을 위해 충남의 한 지역에 간 적이 있었다. 나는 ‘농민과 학생이 연대한다’라는 모호한 말보다는 넓은 밭에 가지런하게 심겨진 푸른 먹거리들을 구경하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밭을 보면 그 댁 어르신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듯 반듯하게 정리된 들판은 그 자체로 예술품이다.

한번은 농민회 아저씨가 학생들 고생한다며 간식을 들자고 청했다. 집에 계신 아주머니께 전화를 한 줄 알았는데, 어느새 읍내 다방 마담이 커피 보온병과 커피잔을 가지고 나타났다. 뾰족한 힐을 신고 논두렁 길을 걸어왔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병에서 커피 프림 등을 한 숟갈 뜨면서 아저씨, 아주머니와도 친하게 이야기했다. 여러 잔의 커피를 사람 수에 딱 맞게 만들더니 “아저씨, 나 지금 바빠서, 저기 배달 좀 갈게. 학생들 좀 있다가 봐” 한다.

대학생들이 이렇게 시골에 나타나면 귀한 손님 대접한다고 아저씨들은 안 하던 일을 벌이신다. “맛있지유?” 아저씨가 자부심 어린 표정으로 물으시는데, 여자 종업원이 따라 주는 커피를 어린 여자인 내가 손님이 되어 먹는 것이 편할 리 없다.

1987년 커피 수입자유화 조치로 원두커피 수입이 본격화되면서 인스턴트 커피는 여러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커피 매장은 ‘카페’와 ‘다방’으로 나뉘어 각각 원두와 인스턴트 커피를 팔았다. 다방들은 고급 이미지의 원두커피에 상대할 힘을 얻기 위해 ‘음악다방’이나 ‘티켓다방’으로 변신을 꾀하기도 했다. 하지만 노래방의 등장은 음악다방의 운명도 위태롭게 했다. 티켓다방은 점점 도시의 변두리로 밀려났다. 시골에서도 이런 현상은 있었는데, 서로 다 아는 지역사회에서 티켓을 ‘세게’ 팔 수는 없고, 고작 배달 서비스가 전부였다.

학교를 마치고 들어간 첫 직장은 금융위기가 촉발한 IMF의 시련이 한창이었다. 직원 모두가 더 높은 생산성을 내기 위해 야근을 불사했다. 가지런한 오이를 수확하는 즐거움은 아니었지만, 어려운 한국 경제를 되살리자는 그런 열정 같은 것이 넘치던 시기였다.

일하는 공간에도 커피믹스와 정수기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IMF는 사무실 커피 문화도 바꾸었다. 커피, 설탕, 믹스를 나누어 담던 도자기병 세트, 뜨거운 물을 끓이는 커피포트,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책임지는 막내 여직원이라는 3요소야말로 사무실 커피 공급의 원천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는 간편함과 빠름을 상징하는 일회용 커피믹스가 대체했다. 물론 정수기라는 기술적 기반이 없었다면 사무실 커피스테이션의 빠른 변화는 없었을 것이다. 이젠 나이 지긋한 부장님도, 나이 어린 신참 직원도, ‘커피믹스는 각자 타 먹어야’ 하는 노동자로서 평등함을 체감하며 IMF가 앞당긴 세상을 살아갔다.

커피는 누가 뭐래도 일하는 사람들의 음료다. 커피의 주성분인 카페인은 아데노신이 수용체와 결합하는 것을 방해해 피곤을 덜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함께 들어 있는 설탕과 크리머는 각각 당으로 분해되어, 우리 몸에서 신속히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연료로 쓰인다. 이런 이유로 커피는 늘 노동의 현장에서 사랑받아 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요즘처럼 온 사회가 경쟁일변도로 치달을 때면 커피도 노동자들의 생산성 향상에 별 도움이 안 된다. 너무 자주 마시는 카페인에 신경이 교란되어 적절한 휴식을 방해하며, 이는 더 많은 카페인을 부르기 때문이다. 신체는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심장 박동수와 호흡이 빨라지고 근육이 경직되며 혈압이 올라간다. 스트레스 반응과 카페인 반응은 비슷하게 신체의 ‘각성’을 유도한다.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 너무 많은 텀블러와 친환경 마케팅, 브랜드 굿즈로 은근히 소비를 부추겼던 커피전문점의 마케팅이 구설이다. 너무 많은 그린 프로모션 앞에 노동자들은 기쁘지 않고, 다회용 컵은 단 한 번의 쓸모를 찾지 못하고 당근마켓으로 직행한다. 한국의 노동자만 기쁘지 아니할까? 천정부지 커피점의 임대료를 떠받치기 위해, 생산지에서 제값도 안 주고 사려는 무수한 중개상인 탓에, 커피를 생산한 노동자도 기쁘지 않기는 마찬가지다.

커피가 잠을 깨우지 못하고, 일하는 사람들을 위하지도 못한다면, 그 커피의 쓸모는 무엇일까. 노동자에게 위안이 되면서도 그린 마케팅이 부끄럽지 않은, 아름다운 커피 한 잔이 절실한 때다.

한수정 아름다운커피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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