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초저출산 난제 해결에 나선 기업들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역대 최저치를 경신했다. 지난달 22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출생·사망 통계(잠정)’에 따르면 지난해 합계출산율은 0.78명을 기록했다. 통계가 나온 이후 가장 낮은 수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출산율이 1명 이하인 나라는 한국이 유일하다.
‘양육’의 어려움은 저출산의 주요인 중 하나다. 최근 저출산 문제 해결을 위해 대기업들이 직원 대상으로 출산·양육 지원 제도를 쏟아내고 있다. 특히 남성 직원 비율이 높은 기업들의 행보가 두드러진다. 전체 직원의 80~90%가 남성인 철강·자동차·화학 기업들은 ‘가족 친화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법적 기준보다 폭넓게 육아휴직을 보장하고, 양육기에 근무시간을 단축하거나 재택근무로 전환하고, 출산 장려금도 지급한다. 그간 여성 비율이 높은 유통·금융·식품 기업에서 ‘여성 친화 정책’이라는 명목으로 여성 직원들 위주로 정책을 내놨던 것과 조금 다르다. 남성들도 출산과 양육에 동참해야 저출산 해결에 근본적으로 다가설 수 있다는 취지다.
포스코 등 남초(男超) 기업들, 공격적 양육 지원책 도입
“처음에는 휴직하려고 했어요. 아내가 출산휴가 3개월간 아이 셋을 돌봤는데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맞벌이를 하다가 둘 다 일을 쉬면 소득이 크게 줄어드니까 많이 고민했죠. 회사에 육아기 직원들을 대상으로 재택근무를 2년까지 쓸 수 있는 제도가 있어서 한번 해보기로 했어요. 오전 8시에 업무를 시작해 오후 5시까지 평소처럼 일하면서 첫째 아이 유치원 하원시키고 틈틈이 다른 아이들을 돌봅니다. 왕복 3시간 걸리던 출퇴근 시간을 벌 수 있어서 아내는 물론 아이들도 무척 만족해요.”
포스코의 성하철(34) 과장은 하루를 새벽 6시에 시작한다. 생후 6개월 된 쌍둥이 아들이 번갈아 가며 잠을 깨운다. 기저귀를 갈고 우는 아이를 달래다 보면 올해 여섯 살인 첫째가 일어나 유치원 갈 준비를 한다. 아내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유치원에 보내고 나면 노트북을 켜고 출근한다. 그는 올해 1월부터 ‘경력 단절 없는 육아기 재택근무제’를 신청했다. 육아기에 있는 직원들이 일과 양육을 병행할 수 있도록 마련된 제도다. 만 8세 이하 자녀 1명당 최장 2년까지 쓸 수 있다. 업무 시간도 8시간 전일 근무와 6시간, 4시간(반일) 중 선택할 수 있다. 성 과장은 “주변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육아휴직 대신 재택근무로 전환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면서 “육아부터가 힘들긴 하지만 휴직에 따른 경력 중단과 소득 감소도 큰 고민거리이기 때문에 육아기 재택근무는 적절한 절충점을 찾은 제도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포스코는 남성 직원이 전체의 94.2%에 이르는 대표적 남초 기업이다. 출산이나 육아 지원 제도의 이용 대상도 주로 남성 직원이다. 포스코는 출산 장려금으로 첫째 200만원, 둘째부터는 500만원을 지급한다. 자녀가 만 8세 이하인 육아기에는 양육 상황에 맞춰 재택근무제 2년, 육아휴직 2년, 근로시간 단축 2년을 골라 쓸 수 있다. 이 제도를 조합하면 두 자녀의 경우 최장 8년까지 재택근무 사용이 가능하다. 본격적인 교육과정에 들어가면 장학금으로 대학까지 최고 1억6000만원을 지원한다. 여성 직원이 임신하면 하루 근무시간을 4시간, 6시간, 8시간 중 선택할 수 있고, 재택근무도 가능하다. 2019년부터는 난임 치료 휴가를 최장 10일간 보장하고 시술비로 1회당 100만원, 최고 1000만원까지 지원하고 있다.
직원 10명 중 9명이 남성인 현대차에서는 자녀 1명당 육아휴직 2년을 보장하고, 휴직 기간에도 연말 성과급을 지급한다. 한화는 남성 직원 대상으로 배우자 출산 시 의무적으로 1개월 출산휴직을 보낸다. 롯데케미칼 역시 최대 2년간 보장되는 육아휴직 기간 중 1개월 의무 사용 기간으로 정하고 있다. KT&G는 육아휴직 기간에도 월소득 200만원을 유지할 수 있도록 휴직 첫해에는 정부 지원금과 별도로 월 100만원, 둘째 해에는 월 200만원을 지급하고 있다.
‘육아기’ 대리·과장급 직원들은 기업의 핵심 인력
기업 차원에서 출산·양육 지원 제도를 내놓는 것은 기업 경쟁력과도 크게 관련 있다. 포스코는 국내 기업 최초로 육아기 재택근무제를 2020년 7월에 도입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재택근무가 활성화될 시기다. 류지현 포스코 기업시민실 리더는 “육아기에 있는 직원들은 대부분 대리·과장급 30대로 회사에서 왕성하게 업무를 해내는 시기”라며 “직원마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경력 단절을 원치 않는 경우가 많고, 회사로서도 새로운 인력으로 대체하기보다 업무 공백 없이 일과 양육을 병행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직원들도 사내 제도 활용에 적극적이다. 원지윤(36) 포스코 마케팅실 과장은 출산 이후 육아휴직을 비롯해 육아기 단축 근로와 재택근무제를 두루 사용했다. 지난해 10월부터 육아기 재택근무로 전환한 원 과장의 근무시간은 오전 7시부터 오후 4시까지다. 정규 근무시간보다 1시간 앞당겼다. 원 과장은 “작년에 5개월 정도 하루 2시간씩 근무시간을 줄여봤는데 아이가 하교하는 시간에 맞추기가 쉽지 않았다”며 “재택근무로 전환하니까 아이도 좋아하고, 단절 없이 경력을 이어갈 수 있어서 만족한다”고 했다. 이어 “아이가 입학할 때나 방학 기간 등 손이 많이 가는 시기에 맞춰 두세 달 정도만 나눠 쓸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며 “분할 횟수에는 제한이 없고 최장 2년 안에 자유롭게 쓸 수 있다”고 했다.
기업 차원의 저출산 대응 정책은 사내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포스코는 지난 2019년부터 저출산 문제 해결을 주제로 한국인구학회,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와 함께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열고 국제 돌봄 정책 콘퍼런스에도 참여했다. 기업이 그간 경제 주체로서 역할을 다해 왔다면 이제 초저출산이라는 사회적 난제 해결에도 나서야 한다는 방침이라는 게 포스코 측 설명이다.
초저출산 해결, 변화는 일터에서 시작된다
기업 차원의 제도 마련이 우선이지만 현장 작동 여부는 별개 문제다. 포스코는 이러한 점을 고려해 사내 공지와 별도로 출산 지원 제도를 적용받는 사원이 속한 부서의 직책자에게 따로 알람을 보낸다.
이를테면 가족출산친화 제도 사용이 가능한 직원과 그 직원의 리더에게 ‘해당 팀원은 육아기 재택근무 등 신청 대상자’라고 알린다. 그 적용 대상자가 팀장일 경우에는 직제상 상급자에게 메시지를 보내 사내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이는 직원이 사내 제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권장하는 조직문화를 형성하기 위해서다.
남성 직원들도 당연히 육아 지원 제도를 사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이용률도 몇 년 새 크게 올랐다. 포스코에 따르면, 만 8세 이하 자녀를 둔 직원들이 출산·육아 지원 제도를 이용한 비율은 2019년 23.8%에서 2020년 29.2%, 2021년 30.6%, 2022년 34.8% 등으로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한국인구학회장을 지낸 은기수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면 양육자들이 하루 대부분을 보내는 일터에서 변화가 시작돼야 하는데, 그간 정부 정책은 현금성 지원 등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면서 기업을 움직이지 못했다”며 “정부는 대기업에서 출산과 양육 지원 정책을 쏟아내는 걸 모범 사례로 삼고 더 많은 양육자가 일하는 중소기업들도 이러한 흐름에 동참할 수 있도록 유인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일요 기자 ilyo@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