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부자 나라다. 그러나 동시에 가난한 사람이 정말 많다. 불평등 때문이다. 미국 정부가 정한 ‘식량 불안(food insecurity)’이란 개념이 있다. 이 말은 생활하기에 충분한 식량을 접근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가계나 개인을 가리킨다. 쉽게 말해 밥을 제때 못 먹는 사람들이다.
2022년 미국 농림부 통계를 보면 미국 사회에서 이 문제가 얼마나 큰 지 감이 잡힌다. 미국에서는 식량 불안정에 속한 가정은 1700만 가정에 달한다. 이 가정에 속한 개인을 다 합치면 4420만 명(한국 총 인구의 86%)이나 된다. 성장기 아이들만 따로 뽑아서 관련 통계를 내보면, 미국 아이들 다섯 명 중 한 명이 제때 밥을 먹지 못하고 있다. 이 숫자들이 중요한 까닭은 이 부자 나라에 얼마나 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있는 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국 정부도 식량 불안전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한다. 미국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을 돕기 위한 많은 정부 정책들이 있다. 이들을 묶어 사회 안전망이라 부른다. 이 중에서 밥 먹는 문제와 관련된 대표적 정책은 ‘보조영양지원정책(Supplementary Nutrition Assistance Program)’이다. 경제적 취약계층이 이 정책에 신청하면 식비에 쓸 수 있는 지원금이 나온다. 주에 따라 최대한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이 다르긴 한데, 일반적으로 가구 구성원 한 명당 최대 한 달에 40만원 정도 받을 수 있다. 구성원이 많으면 100만원 넘게 받는다. 보통 미국 사람들은 이 정책을 ‘푸드 스탬프’라 부른다. 요즘에는 직불카드로 이 지원금을 주지만, 예전에는 종이로 된 교환권(스탬프)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미국 전국 평균을 보면 이 지원금을 받을 자격이 되는 사람들 10명 중에 실제 혜택을 누리는 사람은 8명이다. 와이오밍 같은 주는 받을 자격이 되는 두 명 중에 한 명이 받는다. 필자가 사는 캘리포니아도 그렇게 상황이 좋지 않다. 여기선 받을 자격이 되는 10명 중에 7명이 받고 있다. 공짜로 돈을 주겠다는데, 왜 가난한 사람들이 이 돈을 받지 않을까?
실제 이 지원금에 지원해 보면 그 답을 쉽게 알 수 있다. 지원 과정이 너무 불편하다. 정부 지원금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행정 절차를 거쳐야 받을 수 있다. 이 절차가 복잡하다. 신청서를 작성하는 데 평균 한 시간이 가까이 걸린다. 절차도 까다롭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인터뷰다. 푸드 스탬프 신청 후 30일 이내에 지정된 날짜와 시간에 방문 혹은 전화로 인터뷰를 해야 한다. 여기서 적격 심사를 받는다. 행여나 인터뷰를 놓치면 바로 승인이 거절된다. 이렇게 복잡하고 까다로운 절차는 이 지원금을 받지 못하면 당장 살기가 막막한 가정들에게 큰 문제다.
필자는 지난 수 년간 미국 정부와 함께 미국의 복지 서비스의 접근성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필자의 현재 소속은 존스홉킨스이지만 이전에는 미국의 대표적인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의 데이터 과학자였다. 이곳에서 수행한 많은 정부 프로젝트 중, 콜로라도주의 볼더 카운티 정부와 협력해서 진행한 프로젝트가 있다. 정부, 시민단체, 대학이 협력한 이 프로젝트는 규정과 절차를 지키지 못하는 사람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지키기 어려운 규정과 절차를 바꿨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 지를 실제 정책 지원자들을 대상으로 실험했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우리 팀은 먼저 볼더 카운티에 사는 푸드 스탬프 신청자가 정부가 지정한 날짜와 시간이 아니라, 본인이 편한 시간에 카운티 정부에 전화해서 적격 심사 관련 인터뷰를 할 수 있게 했다. 나아가, 보통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신청서를 작성하는 동안에 인터뷰 의무 사항을 놓칠 수 있으니 문자로 신청자에게 인터뷰를 해야 한다는 것과 인터뷰 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엄밀한 테스트를 위해 푸드 스탬프 신청자를 임의로 통제와 실험군으로 나눠 이 검증 절차를 진행했다.
결과는 큰 성공이었다. 실험군에 속한 지원자들 중에 인터뷰를 한 사람들은 통제군에 속한 사람들에 대비 10퍼센트 더 많았다. 같은 비교를 했을 때, 결과적으로 이 지원금을 받는 사람은 6~7% 증가했다. 필자는 미시간대, 조지타운대 교수들과 함께 이 연구 결과를 논문으로 썼고, 해당 논문을 미국의 주요 대학과 학회에서 발표했다. 현재 이 논문은 미국정책학회(APPAM)의 대표 저널(JPAM)에서 수정 후 게재 요청을 받은 상태다.
왜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은 공짜로 받을 수 있는 지원금을 받지 못할까. 푸드 스탬프뿐 아니라 미국 사회 안전망 정책의 수급률이 평균 50%에서 70% 사이에 있다. 그 이유는 불편이다. 복지 지원금을 받는 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까다롭다. 고용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저소득층 가정에게는 큰 부담이다. 이들이 좀 더 쉽고, 빠르고, 편하게 복지 서비스를 누릴 수 있게 할 때, 복지 사각지대가 좁혀진다.
사람을 탓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괴롭히는 시스템에 초점을 맞출 때, 공공 혁신이 일어난다. 규정보다 사람을 배려하는 정부 서비스가 좋은 정부 서비스다.
김재연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
필자 소개 학계와 실무를 모두 경험한 미국의 공공 영역 데이터 과학자입니다. 존스홉킨스 SNF 아고라 연구소의 연구교수이며 하버드 케네디 스쿨 공공 리더십 센터의 연구위원입니다. 이전에는 미국의 대표적 시빅 테크 단체인 코드 포 아메리카(Code for America)의 데이터 과학자로 미국 정부와 협력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더 쉽고, 빠르고, 편하게 복지 혜택을 누리도록 돕는 일을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KDI 정책대학원에서 데이터 과학 담당 교수로 일했고, 공익 목적의 데이터 과학을 소개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다른 데이터가 필요하다(세종서적 2023)’란 책을 썼습니다. UC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고, 미국 정치학회(APSA)로부터 도시, 지역 정치 부문 최우수 박사학위상(2022), 시민참여 부문 신진학자상(2024)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