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토링부터 주거까지… 돕는 자를 돕는다 [가정밖청소년 新 사각지대]

정부 지원 부족한
가정밖청소년 사각지대

민간단체들
밀착 멘토링으로 해결 나서

이랜드재단 자선 플랫폼
현장 단체 124곳 지원

최상규 선한울타리 대표가 지원하는 자립준비청년 중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반복하는 아이들이 있다. 배달 음식 주문 비용으로만 한 달에 300만원을 쓴다거나 뻔한 속임수에 넘어가 사기를 당하는 경우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어도 하루 이틀을 못 넘긴다. 일상적인 대화는 통하지만 조금만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도 소통이 되지 않는다.

그는 “이런 아이들을 데려가 검사해보면 대부분 ‘경계선지능인’으로 나온다”고 말했다. ‘느린학습자’라고도 불리는 경계선지능인은 IQ(지능지수) 71~84에 해당하며 인지·정서·사회 적응 능력이 낮은 사람을 가리킨다. 최 대표는 “현장에서 느끼는 바로는 보육원 출신 아이들중 경계선지능인 비율이 40% 정도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국회입법조사처가 추산한 전체 인구 대비 경계선지능인 비율인 13.6%와 큰 차이를 보인다.

가정밖청소년들의 경계선지능 문제는 최근 들어서야 주목받기 시작한 분야다. 정부 지원이 없는 영역이라 민간단체들이 직접 나서고 있다. 선한울타리는 세 명 이상의 어른이 경계선지능을 가진 한 명의 청소년을 밀착해서 돕는 삼각멘토링을 진행한다. 최상규 대표는 “깊이 있는 멘토링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공간 확보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쓰레기 분리수거, 설거지 같은 기본적인 생활 습관도 잡혀 있지 않은 아이들이 많다. 이 경우 멘토가 숙소에서 2년 정도 아이와 함께 생활하면서 습관을 잡아줘야 하는데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선한울타리는 올해 3월부터 이랜드재단으로부터 가정밖청소년 멘토링 공간에 대한 월세를 지원받고 있다. 주거비뿐 아니라 생활비, 의료비, 교육비 등도 지원받는다. 최 대표는 “이랜드재단의 지원 덕에 안정적으로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이랜드재단이 지난해 12월부터 운영 중인 새로운 자선 플랫폼 ‘에브리즈’가 현장 단체들에게 좋은 평가를 얻고 있다. 가정밖청소년을 직접 돕는 대신 ‘돕는 단체’들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노혜련 숭실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가정밖청소년을 지원하는 단체는 재정적 어려움과 인력 부족 등의 문제를 상시로 겪는다”면서 “경계선지능, 마약 중독 등 복합적인 문제를 겪는 청소년을 돕는 경우 멘토가 더 빨리 소진될 수 있으므로 ‘헌신하는 사람들에 대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계선지능, 마약… 신(新)사각지대

국회입법조사처의 ‘경계선지능인 현황과 향후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경계선지능인은 전체 인구의 약 13.6%를 차지한다. 이 비율로 따지면 우리나라에는 약 700만명이 경계선지능인인 것으로 추정된다. 경계선지능인은 조기에 발견해 치료와 교육을 받으면 인지 능력을 향상할 수 있지만, 일상생활을 할 때는 특이점이 드러나지 않아 미리 대처하기가 어렵다. 경계선지능인이 적절한 전문가 개입 없이 성인기에 접어들면 구직이 어렵고, 직업 활동을 시작하더라도 일 처리 능력이 떨어져 사회생활을 이어가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경계선지능인을 위한 교육이나 직업훈련 제도가 마련되지 않아 공적 지원은 거의 없다.

전문가들은 “집단 양육환경에서는 경계성지능인 아동으로 자랄 가능성이 1대1 양육환경에 비해 훨씬 높다”고 말한다. 보육사 한 명이 여러 아동을 돌볼 경우 개별 특성에 맞는 적절한 자극이나 반응을 줄 수 없어 뇌 발달이 더딜 수 있다는 것이다. 최상규 대표는 “당사자들이 문제를 쉬쉬한다는 것도 문제”라며 “보육원 출신, 경계선지능인이라는 두 가지 낙인이 찍히는 걸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제천여자단기청소년쉼터(이하 제천청소년쉼터)에서는 경계선지능 청소년의 문해력 향상을 돕기 위한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쉼터 선생님과 함께 신문 기사를 읽고 요약하면서 사회생활에 필요한 이해력을 높인다. 지역 서점을 방문하는 테마 여행을 하면서 맘에 드는 책을 고르고, 함께 생각을 나누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문제는 인력이다. 가정밖청소년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다 보니 멘토를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다. 가정밖청소년들은 유년 시절 가정에서 겪은 트라우마로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경우도 많은데, 이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멘토를 찾기는 더 어렵다. 여러 문제를 복합적으로 겪는 청소년을 만나면 어떻게 아이에게 다가가야 할지 막막할 때도 있다.

이랜드재단은 청소년행복재단과 함께 제천청소년쉼터의 멘토링을 돕고 있다. 청소년 멘토링 경험이 많은 청소년행복재단 관계자와 노정자 제천청소년쉼터장, 상담복지센터 관계자 3명이 화상채팅을 하면서 함께 멘토링 방향과 계획에 대해 논의했다. 내년에는 멘토를 모집해 교육도 진행하기로 했다.

경기도 다르크는 마약 중독 청소년을 치료하는 단체다. 청소년들은 센터에 입소해 24시간 머물며 치료를 받는다. 중독 전문 의료진, 심리상담가들이 이들의 회복을 돕는다.

청소년들이 완전히 중독으로부터 벗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우선 멘토와 돈독한 관계를 쌓기까지 2~3개월이 필요하다. 치료제를 끊고 일상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까지 회복하려면 1년은 걸린다. 개인 부담금은 월 50만원. 연간 비용을 계산하면 600만원에 달한다. 이랜드재단은 가정밖청소년의 입소 비용을 지원한다. 이 밖에 이불, 음식 등 단체 운영에 필요한 물품도 수시로 제공한다.

화평교회는 아웃리치 활동을 하면서 가정밖청소년들을 만나는 단체다. 아이들을 만나다 보면 은둔 중인 청소년과 연결이 될 때도 있다. 이 아이들은 가정불화를 피해 집 밖으로 나오는 대신 자신만의 방으로 더 숨어 들어간 경우다. 어른의 돌봄 영역 밖에 놓여 있기는 마찬가지다. 유제중 화평교회 목사는 교회에 자주 방문하던 가정밖청소년 소개로 은둔 중인 재희(당시 18세·가명)를 알게 됐다. 어릴 적 가정불화로 인해 강박, 우울 등 심리적인 문제를 겪고 있었다. 일상은 전혀 관리되지 않았다. 쓰레기를 모으는 저장 강박증 때문에 방은 발 디딜 틈 없이 악취가 풍겼다. 유 목사를 비롯한 멘토들은 수시로 재희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고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유도했다. 이랜드재단의 지원으로 화평교회에 쉼터가 마련되고서는 멘토들과 지내면서 위생 관리법, 소통 방식 등을 익혔다.

가정밖청소년을 돕는 데 필요한 세 가지

가정밖청소년을 도우려면 ▲멘토링 ▲주거 ▲재정 세 가지 지원이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우선 믿을 수 있는 어른 멘토를 만나 건강한 관계를 경험하면서 사람에 대한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임세희 서울사이버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자신을 수용해주는 어른을 만나지 못하면 가정밖청소년들은 자신을 이해해주는 유일한 존재인 또래와의 만남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며 “이 경우 가정밖청소년이 겪는 심리 정서적 문제들은 오히려 악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노혜련 교수는 “안정감과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가 뒷받침돼야 아이들이 다시 옳은 길로 나아가겠다는 의지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가정밖청소년은 사실상 ‘홈리스’다. 쉼터 외에 정부가 가정밖청소년에게 제공하는 주거 지원은 없기 때문이다. 쉼터는 지켜야 할 엄격한 규칙이 많다는 인식 때문에 가정밖청소년들이 입소를 꺼리기도 한다.

이랜드재단은 단체에 주거비를 지원하는 ‘에브리즈 커뮤니티케어’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화평교회는 방 세 개가 딸린 공동 주거공간과 쉼터 월세비용을 지원받았다. 쉼터가 마련되기 전에는 집을 나온 청소년이 있으면 멘토들이 무인 카페나 건물 비상구 계단에서 함께 밤을 새워주고는 했다. 이제는 200㎡(약 60평) 규모 쉼터에서 2~3일 동안 지내면서 머물 공간을 찾는다.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면 이랜드재단이 지원한 80㎡(약 24평) 규모의 공동 주거공간에 입소하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멘토 2명과 청소년 2명이 지낸다.

재단은 긴급하게 사용할 수 있는 현금지원도 한다. 최상규 선한울타리 대표는 “자립준비청년들은 보육원에서 퇴소할 때 지자체에서 자립정착금을 받지만 충분한 금액은 아니”라며 “살다 보면 목돈이 필요한 경우가 많은데 그때마다 단체에서 대주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이랜드재단이 지원하는 항목은 의료비와 교육비, 생활비다. 파양된 이후 15년 넘게 불면증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던 자립준비청년 민재(23·가명)는 1회 10만원의 비용이 부담돼 상담을 중단하려던 참이었다. 그러다 선한울타리 멘토의 소개로 이랜드재단에서 상담 비용을 지원받게 됐다. 민재는 지금도 상담을 받고 있다. 자립준비청년 정민(24·가명)이는 20살 때 진로를 바꾸고 싶어 대학교를 자퇴하고, 다른 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문제는 한국장학재단에서는 8학기분의 장학금만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이전 학교에서 한 학기 장학금을 받았던 터라 마지막 학기 등록금은 스스로 마련해야 했다. 이랜드재단에서는 정민이 등록금으로 260만원을 지원했다.

이랜드재단이 에브리즈 플랫폼을 통해 주력하는 사업 중 하나는 ‘멘토’에 대한 지원이다. 멘토들이 지치지 않고 더 오랫동안 가정밖청소년을 돌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재단은 멘토 소진 예방을 위해 네트워킹 자리를 종종 마련한다. 그동안 가정밖청소년을 돕는 단체들은 구심점이 없어 한곳에 모이지 못했다. 각개전투로 아이들을 도와온 셈이다. 이랜드재단은 올해 초부터 수시로 멘토들이 만날 기회를 만들고 있다. 선한울타리는 지난 11월 전국 12개 교회에서 활동하는 멘토들이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였다. 이랜드재단에서 모임 장소와 비용 등을 지원했다. 최상규 대표는 “그동안 혼자 가지고 있던 고민을 터놓을 수 있는 자리였다”고 말했다. 내년부터는 멘토를 대상으로 경계선 지능, 심리 상담, 마약 중독 등 전문적인 영역에 관한 강연도 진행할 예정이다.

정영일 이랜드재단 대표는 “현장 단체들은 대상자를 돕는 일에만 집중하다 보니 단체를 체계적으로 운영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는다”며 “초기에는 사명감으로 일을 시작했다가 재정적인 어려움 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지원을 중단하는 안타까운 사례도 많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현장 단체들이 지치지 않고 가정밖청소년 지원에 집중할 수 있도록 파트너십을 강화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최지은 기자 bloomy@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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