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목)

[미래 TALK] 한국형 CSV, 이대로 괜찮은가

유행처럼 번지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지속되기 위해서는 개념부터 확립해야

“CSR은 착한 기업의 일방적인 자선과 나눔이고, CSV는 스마트한 기업의 공동의 가치 창출입니다.”

지난 15일 서울대 A 교수의 말에 국회의원회관 안이 술렁였습니다. 국회 CSR정책연구포럼과 한국사회책임포럼 주최로 열린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VS. 공유 가치 창출(CSV) 대토론회’에서 A 교수는 ‘왜 CSV인가’를 주제로 기조 발제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왜 자꾸 CSR을 자선, 봉사, 사회 공헌과 같은 개념으로만 설명하는지 모르겠다”면서 “뭔가 실수가 있는 건지, 학계에서 정말 그렇게 통용되는 것인지 당황스럽다”면서 얼굴을 붉혔습니다.

CSR은 지배 구조, 공정 거래, 인권, 노동 관행, 환경, 소비자 등 기업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을 고려해 기업이 지켜야 하는 사회적 책임을 일컫는 개념입니다. 반면 사회 공헌은 기업이 벌어들인 수익의 일부를 지역사회를 위해 되돌려주는 활동으로 CSR의 한 부분입니다. 그러나 국내에선 사회 공헌과 CSR을 같은 개념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은 데다가 CSV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세 개념에 대한 혼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A 교수는 “CSR은 기업이 개발도상국에 음식을 가져다준 뒤, 플래카드를 걸고 사진 찍고 악수하는 것”이라면서 “CSR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CSV가 기업에 장기적으로 훨씬 더 도움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토론회에 참석한 패널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ISO 26000 WG 6(Working Group 6·기업의 사회적 책임 부문)에서 5년간 좌장을 맡았던 마틴 노이라이트 교수는 “한국에서 CSV 콘셉트가 유행하는 것을 보고 굉장히 놀랐었는데, 왜 CSR과 CSV를 혼동하는지 이제 알겠다”면서 “CSV는 기본적으로 CSR에 내재된 것이고 새롭거나 다른 것이 아닌데, 마이클 포터가 일부 내용을 뽑아서 CSV라 이름을 붙였을 뿐이고, 전 세계적으로 마이클 포터가 갔던 곳 외엔 CSV에 관심 있는 곳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임홍재 UNGC(유엔글로벌콤팩트) 사무총장은 “CSV에 대한 마이클 포터 교수 글을 읽어보면 CSR을 기부나 자선의 관점에서 많이 보고 있는 것 같다”면서 “기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신뢰도가 낮은데, 이윤 창출의 동기만 가지고 CSV를 추진한다면 사회로부터 지지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영일 EV한영회계법인 상무 역시 앞선 두 패널의 의견에 동의하며 “학계·기업에서 CSR의 명확한 정의를 외면한 채 CSV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심지어 기업 입장에서 초청된 권중현 CJ그룹 상무조차 “CSR을 잘해야 CSV도 잘할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상당수 기업이 CSV가 유행처럼 번지자 기존 CSR팀을 CSV팀으로 교체하거나 CSR과의 차이점을 두고 갑론을박(甲論乙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에 편승해 CSV 관련 포럼이나 CSV 전문가 과정까지 속속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국내 대기업 CEO들 역시 두 개념에 대해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입니다. 조선일보 더나은미래와 고려대 기업경영연구원이 시가 총액 100대 기업 CEO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CSR과 CSV가 동일한 개념이다’라고 답한 CEO가 8% 있었고, ‘CSR이 CSV로 대체될 것’으로 보는 CEO는 59%에 달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유독 한국만 CSV에 열광하는 만큼 지금이라도 한국형 CSR과 CSV 모델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그 논의를 수면 위로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정답은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옳다 그르다 따지기 전에 CSR과 CSV에 대한 명확한 개념 정의와 이해부터 선행돼야 할 것입니다. 소비자와 사회를 향한 기업의 책임은 유행을 타는 이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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