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기업을 재도약시킨 ‘기업시민’의 힘

혁신기업의 경영키워드 ‘기업시민’

CSR, 경영 전반에 내재화
장기적 재무성과로 이어져
경쟁사와 협업, 공급망에 투자

올해 창립 125주년을 맞은 펩시코(PepsiCo)가 지난 14일(현지 시각) 2분기 깜짝 실적을 발표했다. 올 2분기 매출은 223억2200만달러(약 28조2600억원).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0% 이상 늘었다. 펩시코는 펩시콜라, 게토레이, 치토스 등의 브랜드를 보유한 글로벌 식음료 기업이다. 경쟁사인 코카콜라에 밀려 ‘2등 기업’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적이나 규모로는 압도적인 업계 1위다. 지난해 기준 펩시코 매출은 860억달러(약 110조원), 코카콜라는 절반 수준인 430억달러(약 55조원)였다.

펩시코가 승승장구하게 된 계기는 2000년대 초 ‘기업시민(Corporate Citizenship)’을 경영 핵심 전략으로 내세우면서다. ‘기업시민’이란 시민 개개인이 사회적 책임과 의무를 다하듯 기업도 공동체와 환경을 위한 시민의 역할이 있다는 일종의 은유적 표현이다. 구체적으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을 경영 전반에 내재화하는 것을 뜻한다. 펩시코는 건강에 해롭다는 인식이 강한 콜라 대신 에너지 음료와 건강식품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외국산 팜유를 해바라기씨유로 대체하기 위해 직접 농업에 뛰어들었고, 또 음료의 원료인 물 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글로벌 기업을 재도약시킨 '기업시민'의 힘

‘기업시민’은 펩시코뿐 아니라 유니레버, 도요타, 파타고니아, 나이키 등 주요 글로벌 기업들의 경영 전략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포스코가 대표적인 선도 기업이다. 포스코는 2018년 ‘기업시민’을 최초로 경영 전면에 내세우며 사회적 가치가 경제적 가치로 선순환하는 구조를 만들고 있다.

펩시코, 유니레버, 포스코… 성장 비결은 ‘기업시민’

펩시코, 유니레버, 파타고니아와 같은 글로벌 기업의 성장 뒤에는 ‘기업시민’ 경영이 있었다. 2009년 유니레버에 취임한 폴 폴먼 전 CEO가 가장 먼저 한 일은 1년에 4회씩 분기마다 재무 성과를 보고하는 주주 보고를 없앤 것이었다. 90일마다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에서 조직을 해방시킨 뒤 ‘유니레버 지속 가능한 삶 계획(USLP)’을 발표했다. 온실가스와 폐기물 배출을 절반으로 줄이고, 지속 가능한 농업을 지원하고, 낙후 지역의 위생 환경을 개선한다는 내용이었다. 기업의 CSR 담당 부서도 해체했다. 사업과 CSR을 구분하지 않고 그룹 전체가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행 상황은 매년 리포트 형식으로 공개했다.

유니레버는 플라스틱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 제품 용기를 종이로 전환 중이다. 고농축 세탁 제품도 늘리고 있다. NGO와 손잡고 개발도상국에 정수 필터를 보급하고, 질병 퇴치를 위해 ‘세계 손씻기의 날’ 캠페인도 진행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는 식음료 마케팅을 하지 않고 온라인 정보 수집도 금지하고 있다. 사회적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업시민 전략은 유니레버의 매출을 오히려 증가시켰다. 폴먼 취임 첫해인 2009년 유니레버의 연 매출은 400억유로였다. 하지만 퇴임하던 해인 2018년에는 509억유로(약 72조원)로 매출이 약 27% 상승했다. 같은 기간 영업이익은 2배 넘게 늘었다.

포스코는 2018년 기업시민을 경영이념으로 선언하고 이듬해 정관 전문에 기업시민헌장을 담았다. /포스코
포스코는 2018년 기업시민을 경영이념으로 선언하고 이듬해 정관 전문에 기업시민헌장을 담았다. /포스코

국내에서는 포스코그룹이 경영 전반에서 기업시민 가치를 내재화한 기업으로 꼽힌다. 특히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인 ‘저출산’에 대한 해법을 기업 차원에서 찾고 있다. 포스코는 ‘저출산 해법 롤모델 제시’를 목표로 정하고 직원의 결혼에서 출산·양육에 걸쳐 다양한 출산·양육 지원 제도를 시행한다. 지난 2020년에는 국내 기업 최초로 육아와 업무를 병행할 수 있는 ‘육아기 재택근무제’를 도입했다. 육아기 재택근무는 다른 제도와 결합해 최대 6년까지 보장된다. 또 한국인구학회·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와 함께 세미나와 심포지엄을 열고 정책 제안을 하기도 했다.

유니레버와 마찬가지로 포스코그룹에 대한 자본시장의 평가도 좋아졌다. 기업시민 개념을 처음 도입한 2018년 7월 포스코그룹 상장 6개사의 시가총액은 35조2000억원 수준이었다. 5년 만인 올 7월 기준으로 그룹 시가총액은 약 100조원으로 세 배가까이 급증했다. 윤정구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업시민 경영 성과를 단기적으로 측정하면 여러 변수로 들쭉날쭉할 수 있지만 5년이나 10년 단위로 재무 성과 기울기를 측정하면 대부분 우상향을 그린다”며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한 경영 전략과 기업의 장기적 성장 간 인과관계는 여러 글로벌 기업 사례로 충분히 입증할 수 있다”고 말했다.

경쟁 대신 협력으로 사회적가치 만든다

2019년 미국의 주요 기업의 CEO 모임인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BRT)’은 주주 자본주의에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로 전환을 선언했다. 글로벌 기업 CEO 181명이 모여 고객, 직원, 협력사,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장기적 이익을 위해 회사를 운영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는 기업시민 경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성균관대 서베이리서치센터의 한국종합사회조사에 따르면, 대기업 지도층에 대한 국민의 신뢰 수준은 2010년 75.2%를 기록한 뒤 2014년 62.5%, 2018년 58.2%로 10년간 지속적으로 줄었다. 전문가들은 기업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 수준이 낮아진 이유로 경영 전략과 CSR의 분절을 꼽는다. 윤정구 교수는 “기업의 주요 이해관계자인 대중에게 인정받는 기업이 되려면 이들과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며 “자원을 가져다 쓰는 기업이 아닌 자연 환경을 보전하고 공존하는 존재로, 공급망에 있는 협력사와 공생하는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했다.

글로벌 기업을 재도약시킨 '기업시민'의 힘

SK는 2017년 각 계열사 정관상 기업의 목적에서 ‘이윤 창출’을 삭제하고 ‘사회적 가치 창출’을 넣었다. 이듬해 포스코가 2018년 창립 50주년을 맞아 기업시민 경영이념을 그룹에 도입했다. 2019년 포스코가 주최한 ‘기업시민 성과공유회’에 최태원 SK 회장이 특별 강연자로 나서기도 했다. 기업 총수가 타 기업 행사에서 강연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당시 최정우 포스코그룹 회장은 “포스코의 기업시민과 SK의 사회적 가치는 서로 뜻하는 바가 맞닿아 있다”며 “기업시민으로서 시대와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이해관계자와 협력해 더 큰 가치를 창출하겠다”고 했다.

동종 업계 경쟁사끼리 사회문제 해결을 위해 협업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2021년 탄소배출 저감을 목표로 물류를 공동 운송하기로 했다. 각 사가 운항하던 전용선에 타사 제품도 실어 전체 운항 횟수를 줄이는 것이다. 이를테면 현대제철이 당진에서 생산한 제품을 순천항에 하역한 뒤 빈 배로 돌아오지 않고, 광양으로 이동해 포스코 제품을 싣고 당진으로 돌아오는 식이다. 덕분에 물류비를 약 6% 절감했고, 탄소배출 감축 효과도 연간 3000t에 이른다. 글로벌 아웃도어 기업 파타고니아는 세탁으로 발생하는 미세 섬유 플라스틱을 줄이기 위해 삼성전자와 손잡았다. 지난 3년간 연구 개발 끝에 세탁 중 미세 섬유를 98%까지 줄일 수 있는 외장형 필터를 개발했다. 지난달 한국에 출시됐고, 9월 미국에 출시된다. 김광현 파타고니아코리아 환경팀장은 “삼성전자가 아닌 타사 브랜드에도 설치할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고 했다.

공급망까지 넓고 깊게 들여다보라

기업시민을 내세우는 글로벌 기업들은 협력사와 공급망까지 넓고 깊게 들여다보고 투자한다. 유니레버는 공급망을 통한 지속가능한 원재료 수급을 위해 1차 산업인 농업에 투자한다. 지난해에는 재생농업 펀드에 1억유로(약 1400억원)를 투자했다. 재생농법은 논밭을 갈아엎는 경운 작업을 최소화하고 살충제나 합성비료 사용을 줄여 토양을 복원하는 농법을 말한다. 경운 작업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막고 토양을 건강하게 만들어 더 많은 탄소를 흡수하는 방식이다. 파타고니아도 2018년부터 재생 농법으로 목화를 재배하는 농부들을 지원하고 있다. 100% 유기농 원료를 사용해 옷을 만들겠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다. 현재 전 세계 농가 2500곳이 파타고니아의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있다.

도요타는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항에 수소연료전지 시설을 구축해 공급망의 탄소배출을 최소화하고 있다. /도요타
도요타는 미국 캘리포니아 롱비치항에 수소연료전지 시설을 구축해 공급망의 탄소배출을 최소화하고 있다. /도요타

도요타는 수출입 과정에서 발생하는 환경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설비투자에 집중한다. 대표적인 게 항만 시설을 개선하는 ‘트리젠(Trigen)’ 프로젝트다. 도요타는 미국 롱비치항을 통해 연간 20만대의 차량을 수출하는데, 친환경 에너지 전환을 위해 롱비치항에 수소 생산 시설을 늘리고 있다. 도요타 미국법인에 따르면, 2025년 트리젠 체제가 완료되면 매일 1.2t의 재생 가능 수소(renewable hydrogen)를 생산할 수 있다. 도요타의 수소 설비로 항만 운송에 쓰이던 디젤트럭을 수소전기트럭으로 대체할 경우 연간 58억tCO2eq(이산화탄소 환산톤)의 온실가스를 감축할 수 있다. 항구에 도착한 신차는 세차를 해야 하는데 롱비치항에서만 세차에 연간 327만6000갤런의 물을 사용해왔다. 도요타는 설비투자를 통해 물 사용량을 36% 줄였다. 또 트리젠에서의 수소 생산 과정에서 연간 52만600갤런의 물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물 사용을 절반 가까이 줄인 셈이다.

공급망에 속한 구성원들 간의 소득 격차도 해결 과제 중 하나다. 국제노동기구(ILO)의 세계임금보고서에 따르면, 최저임금 이하로 생활하는 근로자는 3억2700만명에 달한다. 파타고니아는 협력사에 ‘생활임금’을 보장한다. 생활임금이란 근로자 가족이 주거비, 교육비, 생활비 등을 고려해 적정한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보수를 말한다. 국가마다 기준이 다르지만 보통은 법정최저임금보다 10% 정도 높다. 포스코는 2018년 그룹사와 협력사의 임금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동반성장 실천 협약’을 체결하고 2년 만인 2020년 대의기구인 ‘상생협의회’를 출범시켰다. 이듬해에는 ‘협력사 공동근로복지기금’을 마련해 그룹사의 복지제도를 협력사에 그대로 적용했다. 이러한 포스코의 사례는 스탠퍼드 경영대학원(MBA)에 전략 경영 사례로 등록돼 수업과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김용근 포스코 기업시민실 그룹장은 “사회의 자원을 활용해 성장한 기업이 사회문제 해결에 동참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면서 궁극적으로 더 큰 경쟁력과 가치를 높이는 것이 바로 기업시민 경영 이념”이라고 말했다

문일요 기자 ily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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