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2일(일)

낙원상가 사장님들 “소외계층 악기, 우리가 책임진다”

개인·단체서 중고악기 기부 받아 
무상 수리한 후 소외계층에 후원 
옥상공연장 콘서트 수익금 기부도 

“형님, 그렇게 연주하시니까 왕년의 실력 나오는데요?” “아이고, 이젠 악기 들기 부끄러워. 멋지게 소리나 고쳐봐야지.”

지난 21일 오후, 종로 낙원악기상가 2층. 색소폰, 기타, 바이올린, 플루트 등 악기를 손에 든 신사 8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합주를 하나 했더니, 각자 악기를 무릎 위에 올리곤 한 음 한 음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나사를 몇 번 풀고 조이자, ‘끼익’거리던 선율이 부드러워진다. 음계가 완벽해질 때까지 몇 차례 꼼꼼하게 체크하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알고 보니 모두 20년 넘게 낙원악기상가를 지켜온 사장님들이다. 기타리스트, 바이올리니스트부터 영국 맨체스터대학에서 악기 제작 학위를 받은 전문가까지 이력도 다채롭다. “낙원악기상가에서 10년 경력은 명함도 못 내밉니다. 각자 전문으로 하는 악기만큼은 완벽한 소리를 내게 만드는 장인(匠人)들이거든요.” 유강호 낙원악기상가 번영회 회장(유일뮤직 사장)이 설명했다. 한참 악기를 조율·수리하던 사장님들은 “앞으로 재능기부 많이 하려면 틈틈히 수련해야 한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낙원악기상가는 개인·기업·단체 등으로부터 중고 악기를 기부받아 무상으로 수리 및 조율한 뒤, 문화 소외계층 아이들에게 지원하는 사회공헌을 시작했다. 지난 21일, 이번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낙원악기상가 번영회 소속 각 악기업체 대표들의 모습.
낙원악기상가는 개인·기업·단체 등으로부터 중고 악기를 기부받아 무상으로 수리 및 조율한 뒤, 문화 소외계층 아이들에게 지원하는 사회공헌을 시작했다. 지난 21일, 이번 사회공헌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있는 낙원악기상가 번영회 소속 각 악기업체 대표들의 모습.

낙원악기 상가 사장님들이 뭉쳤다. 개인·기업·단체를 통해 중고 악기를 기부받아 무상으로 수리 및 조율한 뒤, 이를 문화예술 소외계층의 악기 교육 사업에 지원하는 ‘악기 드리미’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 낙원악기상가는 3월 한 달간 사회복지법인 ‘함께걷는아이들’을 통해 문화 소외지역 아이들이 필요로 하는 악기를 신청받았다. 전국 지역아동센터·아동양육시설·그룹홈 등 416개 기관에서 문의가 쇄도했다. 바이올린 755대, 피아노 135대 등 요청받은 악기만 무려 2602개에 달한다. 혹여 기부받은 중고 악기 숫자가 필요한 양에 못 미칠 경우를 대비해, 낙원악기상가는 4층 야외공연장 ‘멋진하늘’에서 진행되는 공연 수익금을 부족한 악기 구입에 활용할 계획도 세워뒀다.

낙원악기상가의 각 악기업체 대표 사장님들이 주축이 된 만큼, ‘재능 기부에 동참하고 싶다’는 곳들이 속속 늘고 있다. 2006년부터 악기 판매 및 수리를 해온 박경배 지윤악기 대표는 “금관악기 튜바를 전공하고 연주 생활을 하다가 수리를 시작했는데 너무 재미있더라”면서 “낙원악기상가에서 구매한 악기는 무기한 AS를 해주기 때문에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신다”고 설명했다. 이번 프로젝트에는 오래전부터 남 몰래 나눔을 실천해온 이들이 대다수 참여했다. 40년 넘게 관현악기 전문 판매 및 수리를 해온 유재복 ㈜진성악기 대표는 몇 년 전부터 ‘함께걷는아이들’에 재능 기부를 해왔다. 문화 소외지역 아이들로부터 악기가 고장났다는 연락을 받으면, 온종일 출장 서비스를 나가 고장난 악기를 수리하고 교육을 진행해온 것. 정병석 온누리음향 대표(번영회 수석부회장)는 10년 전 백혈병소아암어린이돕기재단 창립 때부터 임원으로 참여해 환아 가족 여행 프로그램을 진두지휘하는 등 이번 악기 드리미 프로젝트에도 나눔 노하우를 십분 발휘하고 있다. 15년 차 색소폰 수리 장인으로 ‘SBS 생활의 달인’에 방송된 김연성 베델악기 대표도 재능 기부에 열심이다. 색소폰 수리를 위해 그를 찾는 고객 수만 한 달 평균 500여명. 악기 수리 기술자가 없는 중국에선 김 대표를 초청해 수리를 부탁할 정도다. 악기에 따라 수리 비용만 수백만원에 이른다. 그럼에도 김 대표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겐 무상으로 색소폰을 수리해주고 있다.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고(故) 이태석 신부가 생전에 한국에 왔을 때, 악기 100대를 무상 수리 및 기부하기도 했다. 그는 “낙원악기상가 업체 대표들이 한마음으로 재능을 나누는 특별한 프로젝트인 만큼, 열심히 참여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렇게 재능 나눔에 참여하는 낙원악기상가 업체는 20여곳에 이른다.

낙원악기상가는 지난 3월 7일부터 낙원악기상가 홈페이지(enakwon.com) 및 블로그(blog.naver.com/enakwon), 함께걷는아이들 홈페이지(withu.or.kr)를 통해 중고 악기를 기부받고 있다. 이렇게 받은 악기들은 말끔히 수리돼 각 지역의 사회복지시설에 전달, 문화 소외계층 아동 및 청소년 악기 교육에 사용될 예정이다. 올 하반기엔 기부된 악기를 통해 실력을 갈고닦은 학생들을 초청해 특별한 공연도 마련한다. 박주일 에클레시아 대표(번영회 총무)는 “낙원악기상가에서는 직장인 무료 악기 강습, 시니어 축하 연주 강습 등 다양한 사회공헌을 진행하고 있다”면서 “악기를 배우고 싶어도 경제적, 환경적 어려움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아이들이 꿈을 키우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며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했다.

정유진 더나은미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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