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7일(토)

[사회혁신발언대] 플라스틱 상술에 갇힌 케이팝

누하 이자투니사(Nuha Izzatunnisaa) 케이팝포플래닛 캠페이너, 인도네시아

나는 2018년 한국의 예능 프로그램에서 에이티즈를 보고 케이팝을 처음 알게 됐다. 리듬에 몸을 맡기지 않으려 애쓰다 실패하는 모습에 매료된 나는 그들의 음악을 찾아 들었고, 강렬한 사운드에 빠져들었다. 일주일 뒤에는 ‘I love you so much Yoonho’라는 트위터 헌정 계정을 만들며 열혈팬이 됐다.

팬이 된 뒤, 케이팝의 세계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복잡했다. 나보다 8년 먼저 엑소의 팬이었던 동생은 내 유난에 혀를 찼지만, 지금의 팬 활동은 단순히 유튜브 ‘좋아요’를 누르던 예전과는 다르다. 팬들은 밀리언셀러(음반 100만 장 판매 가수)를 만들기 위해 한국에서 직접 앨범을 주문한다. 한 장이 아니다. 앨범에 들어있는 ‘최애’의 포토카드를 모으기 위해, 커버 사진이 다른 앨범을 모으기 위해 같은 음반 여러 장을 사는 것은 이곳 인도네시아 팬들에게도 기초적인 ‘덕질’에 속한다.

특히 한국 아이돌의 공연을 직접 보기 힘든 우리가 꿈에 그리는 덕질은 팬콜(fan call)이다. 아이돌 그룹의 멤버와 1대 1로 화상 채팅을 하는 것인데, 불과 1분 남짓이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황홀한 경험이다. 팬콜 응모권은 앨범 구매에 따라 주어진다.

누하 이자투니사 캠페이너가 ‘지구는 JWY(에이티즈 우영)보다 더 뜨거워질 수 없다’라고 적힌 포스터를 들고 있다. /누하 이자투니사

2021년, 나는 팬콜에 당첨된 친구가 8장의 앨범을 샀다는 소식을 듣고 15장을 주문했다. 그러나 구매대행사는 “30장은 구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60장을 사고도 떨어진 친구가 있었고, 150장을 구매한 사람도 있었다. 앨범 한 장이 약 22만 루피아(한화 약 2만 원), 150장이면 3300만 루피아(한화 약 290만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인도네시아 사회초년생의 열 달 치 월급과 맞먹는다.

물론, 음반을 많이 산다고 무조건 팬콜에 당첨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기준을 알 수 없으니, 경쟁적으로 음반을 사 모으는 팬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구매한 음반을 전부 배송받는 것도 아니다. 무게당 붙는 배송비가 음반값보다 더 비싸기 때문이다. 나는 주문할 때마다 구매대행사에 포토카드만 빼서 저렴한 우편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음반 실물은 알아서 처리해 달라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여러 장의 앨범을 구매하지 않는다. 돈도 돈이지만 나의 덕질이 환경오염에 일조하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이다. 앨범을 만드는 플라스틱도 결국 화석연료에서 나온다. 인도네시아는 세계에서 기후위기 피해를 가장 심하게 받는 나라 중 하나다. 올해 봄 수마트라, 술라웨시, 테르나테 등지에서 발생한 홍수로 1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죽고 수많은 주민이 이재민이 됐다. 엘니뇨로 인한 흉작에 지난해에는 쌀값이 폭등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이러한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한다. 홍수에 취약한 저지대가 그들의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지구를 걱정하는 전 세계 케이팝 팬들의 기후행동 플랫폼 ‘케이팝포플래닛’에서 ‘플라스틱 앨범의 죄악’이라는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다. 엔터테인먼트 업계의 비윤리적이고 반환경적인 마케팅 관행을 비판하는 활동이다. 확인해 보니, 내가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 최근 6개월간 40번의 팬콜을 진행했다. 그 과정에서 또 얼마나 많은 앨범이 버려졌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다. 일부는 “너희들이 사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팬들의 진심을 악용하는 마케팅이 사라지지 않는 한 문제는 어떤 형태로든 반복될 것이다.

누하 이자투니사를 비롯한 케이팝포플래닛 캠페이너들이 현대차 전기차충전소 앞에서 그린워싱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앞서 현대차는 BTS를 모델로 기용해 지속가능성을 홍보한 바 있다. /누하 이자투니사

인도네시아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케이팝 팬은 기후변화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나무 심기와 멸종위기 동물 보호 등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케이팝을 즐기는 행위가 기후위기와 플라스틱 오염에 일조하는 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나를 힘들게 만든다. 최근에는 세계적 팝스타 테일러 스위프트가 여러 버전의 앨범 커버를 공개했다가 ‘지나친 낭비’라는 비판을 받았다. 케이팝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그늘도 함께 커지는 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마침 11월, 케이팝의 본고장 한국에서 유엔 차원의 플라스틱 협약을 만들기 위한 논의의 자리가 마련된다. 이를 계기로 한국의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도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는 변화가 시작되기를 바란다. 죽은 지구에는 케이팝도 없으니까.

누하 이자투니사(Nuha Izzatunnisaa) 케이팝포플래닛 캠페이너, 인도네시아

필자 소개

2018년 에이티즈에 빠진 인도네시아 케이팝 팬. 케이팝 산업에서 엄청난 폐기물이 나온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환경에 관심을 갖게 됐다. 케이팝을 더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바꾸고 싶어 케이팝포플래닛에 합류했다. “케이팝 팬들이 숲 조성, 자연재해 기부 같이 최애를 아끼는 만큼 자연을 사랑하는 모습을 봤어요. 이렇게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다 엄연한 기후행동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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