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1일(금)

[지역의 미래] 지역을 살리는 브랜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오승훈 공익마케팅스쿨 대표

지난해 순천만 정원박람회를 찾은 사람은 980만 명이었다. 이로 인한 생산유발효과는 1조 5900억 원이 넘고 2만 5000여 명의 일자리 창출 효과도 있다고 한다. 순천의 인구도 정원을 조성한 2013년부터 최근까지 꾸준히 증가해 왔다. 지난 6월 한국고용정보원이 발간한 ‘지역산업과 고용’ 여름호에 따르면 전라남도 지자제 22개 중 순천시와 광양시만 지방소멸 위험지역에서 제외됐다.

감귤도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이다. 지난해 제주 감귤의 조수입(경영비를 포함한 수입)은 1조 3000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며 약 3만 호의 농가에 소득을 제공했다. 안동 간고등어, 보성 녹차, 담양 대나무숲, 양양 서핑도 지역을 대표하는 브랜드다. 이런 브랜드를 모든 지자체는 갖고 싶어 하지만 모든 지역 브랜드가 지역을 살리는 브랜드가 되는 건 아니다.

◇ 고유자원의 희소성

순천시는 유네스코 생물권 보전지역,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타이틀을 모두 보유하고 있다. 지자체의 생태보전 스펙으로는 역대급이다. 기후변화로 감귤 재배지역이 북상 중이지만, 제주의 자연과 감귤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연평균 기온 13.4℃, 연평균 강수량이 1400mm인 보성은 바다와 강이 인접해 있어 안개일수가 많아 차(茶)나무 생육에 최적의 입지다.

순천만습지 국가정원. /순천만습지 사이트 갈무리
순천만습지 국가정원. /순천만습지 사이트 갈무리

이러한 고유자원의 희소성이 지역을 살리는 브랜드의 첫째 조건이다. 고유자원이라도 희소가치가 없으면 브랜드가 힘을 갖지 못한다. 희소성은 시장의 수요는 크지만 공급이 충분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은 5개 지역밖에 없지만, 적멸보궁 때문에 해당 지역을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반면 유네스코 3관왕의 생태환경, 달콤새콤한 과일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이는 순천과 제주의 고유자원이기에 지역을 살리는 브랜드가 될 수 있다.

◇ ‘내적 투쟁’의 스토리

순천만 습지는 정원박람회 이전부터 세계적인 두루미의 월동지로 알려져 있었다. 2002년 10만 명이었던 탐방객은 3년도 안 돼서 300만 명으로 늘어났고 자동차 매연과 소음, 습지환경이 파괴돼 인근 주민들의 불만도 급증했다.

순천시는 학계, 시민단체와 함께 습지 보호와 생태관광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차량을 통제하기 위해 순천만의 입구를 도심 방향으로 옮기고 국제습지센터를 건립했다. 습지의 파괴를 최소화하고 도심 공간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에코벽(echo wall)을 세웠는데 그 벽이 바로 순천만 국가정원이다.

‘지속가능성의 도시’ 스웨덴 말뫼를 언급하며 ‘말뫼의 눈물’을 빼놓을 수 없다. 1980년대부터 지역의 기반이었던 조선업이 무너지며, 말뫼의 상징이었던 세계 최대 크레인을 현대중공업이 1달러에 인수했다. 스웨덴 국영방송이 레퀴엠(미사곡)과 함께 크레인의 선적 장면을 중계해서 많은 시민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94년 취임한 일마 리팔루 말뫼 시장은 크레인이 있던 자리에 터닝 토르소(Turning Torso)를 건축한다. 터닝 토르소는 지상 54층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높고 재생에너지 100%로 운영되는 주거 빌딩이다. 저층 건물들 사이에 우뚝 솟아 있어 말뫼의 미래를 상징하는 듯하다.

스웨덴 말뫼에 위치한 터닝 토르소./ 위키피디아

세계적인 스토리 컨설턴트 리사 크론은 “주인공의 내적 투쟁이 스토리를 밀고 나가는 힘”이라고 말했다. 외부에서 벌어지는 도전과 위협에 맞서는 주인공의 내적 변화가 스토리 전체에 전깃줄처럼 이어져야 스토리에 힘이 생긴다. 흥행에 성공한 드라마나 영화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무적의 캐릭터 마동석도 아무런 도전 없이 범인을 검거하진 않는다.

브랜드의 내적 투쟁은 흥행 상품의 탄생 과정과 유사하다. 고객의 페인 포인트(Pain Point)를 해소하기 위해 상품 기획과 내적 투쟁의 플롯(구성)은 동일한 스토리 구조다. 평범한 주인공(고객)이 불현듯 나타나 위기 상황(Pain Point)을 극복하며 클라이맥스를 치닫고 결국 주인공의 승리로 끝나는 기승전결의 구조를 띠고 있다. 모든 브랜드가 기승전결의 구조를 띠고 있지는 않지만 성공한 브랜드의 대부분은 이런 구조의 스토리를 갖고 있다.

외적 도전과 위협이 강할수록 고객의 페인 포인트가 심각할수록 그것을 극복하면 독보적인 브랜드가 된다. 경쟁력은 남들이 하지 않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해결하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 최초의 인

양양의 파도가 서핑하기에 가장 좋은 파도는 아니다. 최초로 대중에게 서핑 해변을 인식시켰을 뿐이다. 사전에서 인식은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앎’이라고 설명한다. 새로운 정보가 생기면 뇌가 그것을 다른 정보와 구별해서 지식으로 저장한다는 의미다. 마케팅에서는 브랜드(Brand Position)이라고 한다.

사람의 뇌는 새로운 정보를 저장할 때 카테고리와 순위를 고려해 저장한다. 커피가 당길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브랜드는 ‘카페’라는 카테고리에 1순위에 자리 잡고 있는 브랜드다. 모든 브랜드의 목표는 특정 카테고리에 1순위로 포지셔닝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특정 카테고리에 1순위로 자리 잡는 가장 쉬운 방법은 뭘까. 기존의 카테고리에 들어가서 점차 순위를 높여가는 것일까,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드는 것일까. 둘 다 어렵지만 그나마 쉬운 방법은 후자다. 1순위로 자리 잡은 믿음을 바꾸는 것보다 새롭고 희소성 있는 것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서핑 해변이라는 카테고리는 없었다. 양양이 최초로 시도하면서 ‘서피비치’라는 카테고리가 만들어졌다. 이후 동해안과 서해안에 각종 서핑 해변이 만들어졌지만 그 모든 해변은 양양이 만든 카테고리에 후순위로 자리를 잡았다. 그래서 서퍼들의 서핑 해변 대부분을 양양이 차지하고 그 후순위로 동해안과 서해안의 해변이 나눠 가져간다.

◇ 광고와 홍보와 차이

희소성, 스토리, 최초의 인식을 갖추었어도 홍보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흔히 광고와 홍보를 혼동하기 쉬운데, 마케팅에서 광고는 ‘내 입으로 내 칭찬을 하는 것’이고 홍보는 ‘남의 입으로 내 칭찬을 하는 것’이다. 대부분 지자체는 지역 브랜드를 ‘홍보’하지만 실상은 ‘광고’다.

얼핏 보면 광고보다 홍보가 좋아 보이지만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할 수는 없다. 홍보의 장점은 신뢰성이고 단점은 통제 불가능성이다. 남의 입을 빌려 칭찬을 하니까 이야기의 신빙성은 있지만 브랜드가 원하는 타깃에게 원하는 요소를 칭찬하도록 통제할 수는 없다.

광고는 홍보의 장단점을 뒤집으면 된다. 신뢰성은 떨어지지만 브랜드가 원하는 타깃에게 원하는 요소를 자랑할 수 있다. 대중적 신뢰성이 필요하면 홍보를, 정확한 타깃에게 메시지 전달이 필요하면 광고를 사용한다.

지역 브랜드는 대체로 신뢰성을 기반으로 성장한다. 적극적으로 생태를 보전하는 도시라면 정주하기에도 좋을 것이라는 믿음, 그러한 기후와 토양이라면 맛있는 과일이 자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희소가치 높은 고유자원이나 역경을 이겨낸 스토리는 남의 입을 빌려 칭찬받기에 좋은 소재가 된다.

◇ 다양성의 생태계

‘종의 기원’에 나온 자연선택은 특정 환경에서 적합한 형질을 가진 개체들이 살아남는다는 의미다. 그렇게 생존한 개체들만 남으면 종 다양성은 줄어들 것 같지만 오히려 다양성이 풍부해지는 이유는 돌연변이 때문이다.

지역을 살리는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의 혜택이 오직 박람회로 수렴되면 경쟁력을 점차 잃어가지만, 지역의 다양한 산업 생태계를 조성하면서 경쟁력이 더 강화된다. 안동 간고등어는 내륙 지방에 생선을 공급하기 위해 염장을 했다는 내적 투쟁의 스토리와 최초의 인식을 갖고 있지만, 간고등어 외에 돌연변이가 생기지 않아 지역을 살리는 브랜드로서 충분한 역할은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많은 지자체에 우후죽순처럼 생기는 ‘정원박람회’는 결국 모두의 경쟁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2023년 기준으로 23곳의 지자체가 국가정원을 추진 중이라고 하니 “이러면 다 죽는다.” 지자체마다 고유의 매력을 만들어야 국민들에게 선택의 풍요로움이 생기고, 서울보다 더 나은 지방이 아니라 서울과 다른 매력을 가진 지방이 만들어진다.

오승훈 공익마케팅스쿨 대표

필자 소개

마케팅은 더 많은 사람을 위해 쓰여야 한다는 믿음으로 ‘지역의 미래’를 탐구하는 오래된 마케터입니다. 현재 공익마케팅스쿨 대표이자 공익 싱크탱크 그룹 ‘더미래솔루션랩’의 전문위원으로, 공익 마케팅 전략과 지역경제 정책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슬리퍼 신은 경제학’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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